제주 포도뮤지엄, ‘어쩌면…’展 佛 부르주아 등 국내외 작가 10개팀 흩어지는 기억 형상화한 작품 선봬
민예은 작가의 설치 작품 ‘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 때’(2024년). 기억을 구성하는 공간이 작은 조각으로 해체돼 공중을 떠다니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포도뮤지엄 제공
전시장 한가운데 낡은 나무 문들이 벽처럼 나란히 줄지어 웅크리고 있다. 성인 한 명만 들어갈 정도로 열린 틈으로 다가서면 누군가가 누워 있었던 것 같은 침대가 쓸쓸히 놓여 있다. 그 옆으로는 유리병과 의료 도구가 수북이 쌓여 있어 침대의 주인이 아픈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프랑스 작가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가 1991년에 만든 ‘밀실 1’이다.
부르주아가 어린 시절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있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을 담은 작품 ‘밀실 1’이 제주도를 찾았다. 20일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에서 개막한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부르주아와 로버트 테리엔, 시오타 지하루, 정연두, 강서경, 민예은 등 국내외 작가 10개 팀의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장 속 작품 대부분은 기억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미국 사진가 셰릴 세인트 온지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 연작은 인지저하증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기록한 사진들이다. 따스한 햇볕 아래 엄마의 흰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모습, 농장의 말과 머리를 맞댄 모습 등 평화로운 일상을 담았다. 20일 미술관에서 만난 작가는 “처음엔 아픈 엄마의 사진을 찍어도 되나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며 “미국에서는 제 작품이 너무 어둡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행복과 기쁨이 드러나 좋았다”고 말했다.
기억과 인지력이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을 음악으로 담은 ‘더 케어테이커’는 화가 이반 실과 함께 오디오 설치 작품 ‘텅 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를 전시했다. 11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43분 분량의 음악 앨범과, 이 음악을 토대로 이반 실이 그린 회화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다.
데이비스 벅스의 ‘재구성된 풍경’ 연작은 건축 현장에서 주운 나무 합판 위에 풍경을 그린 다음 합판을 부숴서 조각냈다. 부서진 조각을 다시 퍼즐을 맞추듯 모아서 벽에 걸었다. 작가는 “기억이 과거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서 재해석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오타 지하루의 신작 ‘끝없는 선’은 책상이 있는 공간 위로 알파벳이 달린 검은 실이 끝없이 늘어져 기억을 구성하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밖에 정연두의 ‘수공기억’, 천경우의 ‘가장 아름다운’과 포도뮤지엄이 기획한 테마공간 ‘Forget Me Not’ 등을 볼 수 있다. 내년 3월 20일까지. 1만 원.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