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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김연아’ 꿈꾸는 아이 위해 오늘도 운전대 잡는 ‘피겨 맘’

입력 | 2024-03-30 01:40:00

[위클리 리포트] 어린 피겨선수는 부모님 차에서 자란다
새벽 4시부터 빙상장-학교-PT-발레
16시간 빈틈없는 빡빡한 스케줄에… 친구 약속-병원 진료도 뒤로 미뤄
뒷바라지 4년간 운전만 20만 km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기도 했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 보면 말릴 수 없어




《‘리틀 김연아’ 키우는 피겨 맘의 하루

프로야구 선수 시절 명지도자 후보로 꼽혔던 정근우는 막내딸 수빈이가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한 뒤로 프로 지도자는 엄두도 못 낸다. 자녀 뒷바라지로 하루 24시간도 부족한 ‘피겨 맘’, ‘피겨 대디’를 동행 취재했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은 시즌마다 피겨스케이팅 주니어 그랑프리 일정이 끝나면 종목별 상위 6명만 초대해 왕중왕전 성격의 ‘파이널’을 연다. 이번 시즌 파이널에서는 김현겸(18·경신고)은 남자 싱글에서, 신지아(16·세화여고)는 여자 싱글 은메달을 각각 따냈다. 어린 나이의 피겨 선수들이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낼 정도로 성장하려면 부모 중 적어도 한 명의 헌신은 필수다. 한국 피겨가 주니어 무대에서 세계 정상급으로 발돋움한 데는 ‘피겨 맘’, ‘피겨 대디’의 공헌이 작지 않았던 것. 야구 국가대표 2루수였던 정근우(42)의 가족을 통해 ‘피겨 부모’의 삶을 들여다봤다.



“새벽 4시 출발인데 가능하시겠어요?”

정근우에게 ‘피겨 선수로 활동하는 막내딸 수빈이(12·인천신정초)의 하루 일정을 동행 취재해도 되겠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수빈이는 인천 송도 집에서 약 40km 떨어진 경기 과천시민회관 빙상장에서 오전 5시부터 훈련을 시작한다. 이 시간에 맞추려면 오전 4시에 일어나 10분 안에 양치와 세수를 마치고 집에서 출발해야 한다.

① 빙상장 도착 수빈이는 매일 오전 4시면 인천 송도 집을 나서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40km 떨어진 경기 과천시민회관 빙상장에 출근한다. 인천·과천=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임보미 기자

월요일이었던 25일 오전 5시 과천시민회관에서는 수빈이를 포함한 초·중학생 피겨 선수 10명이 두 줄을 지어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달리기로 몸을 푼 이들은 계단으로 줄지어 이동해 발목 근력 운동을 이어갔다. 이후 복도에 다시 한 줄로 선 선수들은 돌림판을 이용해 스핀을 연습하거나 제자리에서 점프해 회전을 점검하는 등 자신에게 필요한 훈련에 집중했다.

빙상장에서 오전 10시까지 훈련한 수빈이는 다시 40km를 달려 인천 집에 도착한 뒤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다. 그러고는 또 30km를 이동해 오후 2시부터 경기 안양종합운동장 실내빙상장에서 훈련했다. 이어 오후 6시 반부터 8시까지 발레 교습을 받았다. 16시간 만에 이날 일정을 모두 마무리한 것이다. 그런데도 수빈이의 어머니 홍은숙 씨(42)는 “월요일은 그나마 동선도 짧고 일정도 일찍 끝나는 여유로운 날”이라고 했다.

② 지상 훈련 빙상 훈련은 오전 6시 시작이지만 잠이 덜 깬 상태로 고난도 훈련을 하면 부상 위험이 있어 지상 훈련을 1시간가량 먼저 한다. ‘계단뛰기’ 훈련을 하는 수빈이. 인천·과천=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임보미 기자

수빈이는 수요일을 제외하고 일주일에 6일은 빙상장 대관 훈련을 하루에 두 번 소화한다. 수요일은 세 번이다. 월·화·목요일에는 발레 교습, 화·금요일에는 피겨 전문 퍼스널트레이닝(PT)을 받는다. 또 목·토·일요일에는 점프에 도움이 되는 ‘하네스 훈련’이 기다린다. 홍 씨는 “수빈이 운동 스케줄이 이렇게 고정되고 나서 남편에게 ‘야구는 운동도 아니다’라고 했다”며 웃었다.

●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운동

자녀가 엘리트 피겨 선수가 되기로 마음을 먹으면 부모는 자동으로 ‘로드 매니저’가 되어야 한다. 과천시민회관에서 오전 5시에 선수 10명이 훈련한다는 건 피겨 맘, 피겨 대디도 최소한 10명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이들은 자녀가 훈련하는 동안 지하 주차장에서 잠시 눈을 붙이거나 관중석에서 졸린 눈으로 아들딸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③ 휴식 새벽 훈련을 마치면 약 1시간을 쉬지만 이때도 제대로 쉬는 시간은 거의 없다. 수빈이는 휴게 공간에서 스케이트 날을 직접 정돈한 뒤 복도 바닥에 요가매트를 깔고 폼롤러로 전신의 근육을 풀었다. 그러고 나서야 엄마가 만든 그릭 요거트로 아침을 먹었다. 인천·과천=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임보미 기자

이 생활을 기꺼이 감내하는 학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잘나가는 자녀를 둔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수빈이는 지난해 전국체육대회 12세 이하 여자 싱글 부문 금메달을 땄고 올해는 대한빙상경기연맹 주관 ‘피겨 꿈나무 선수 겨울 합동훈련’ 프로그램에 뽑힌 유망주다. 하지만 홍 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제 그만하자’며 딸을 말렸다.

“이렇게 말하면 속물 같아 보이겠지만 피겨는 ‘가성비’가 너무 안 나오는 운동이에요. 들어가는 돈은 둘째치더라도 투자하는 노력에 비해 빛을 너무 짧게 보잖아요. 또 성공해서 ‘빛을 봤다’ 하는 사람도 김연아 선수 정도고요. 제가 수빈이한테 그랬어요. ‘정근우는 몇백 명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김연아는 온리 원(only one)이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제가 그럴수록 수빈이는 더 열심히 하더라고요.”

과천시민회관에서 초등학교 1학년 시절 ‘피겨 여왕’ 김연아(34)를 지도해 이곳을 ‘피겨의 성지’로 만든 변성진 코치(53)는 “예전엔 잘 몰랐는데 어머니들이 ‘피겨를 시키면서 들어가는 비용 중에 선생님 레슨비가 제일 싸요’라고 하시더라. 피겨는 다른 운동과 달리 보조적으로 해야 하는 운동이 참 많다. 표현력이나 유연성 기르려고 발레, 리듬체조도 하고 점프 회전력 기르려면 회전(하네스) 센터도 다녀야 한다. 또 피겨 전문 PT도 요즘에는 다 받는 추세”라고 말했다.

④ 빙상 훈련 과천시민회관 직원들을 위한 ‘스트레칭’ 방송이 나오는 오전 9시는 수빈이가 이미 두 번째 빙상 훈련이 한창인 때다. 훈련을 한 번 하면 장갑과 양말이 다 젖어 가방에 늘 여분의 장갑과 양말을 챙겨 다닌다. 인천·과천=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임보미 기자

스케이트 훈련은 선수 여러 명이 함께 빙상장을 대관해 코치 한 명에게 단체로 지도를 받을 수 있다. 반면 발레, 필라테스, 하네스, PT 같은 보조 훈련 프로그램은 개인별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일대일로 진행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강습비만 따지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변 코치는 “훈련이 점점 전문화되고 세분화되면서 스케이트부터 PT까지 한 달 스케줄을 한 번에 짜는 게 기본이 됐다. 이런 훈련 없이 주니어 국제무대에서 메달을 다투는 수준의 경쟁력을 갖기는 쉽지 않다. 극성 학부모가 ‘피겨 맘’이 되는 게 아니다. 엄마든 누구든 아이의 24시간을 함께 움직여 줄 사람이 없다면 이 운동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 문자 그대로 ‘등골 브레이커’

⑤ 귀가 수빈이와 어머니 홍은숙 씨가 오전 빙상 훈련을 마친 뒤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어머니 홍 씨가 오른손에 끌고 있는 여행가방에는 피겨 선수들의 필수품인 스케이트화와 날이 담겨 있다. 인천·과천=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임보미 기자

수빈이는 아버지 정근우가 프로야구 무대에서 은퇴한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엘리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아내 홍 씨로서는 야구 선수 뒷바라지 15년을 끝내자마자 피겨 선수 뒷바라지를 시작한 셈이다. 수빈이와 항상 붙어 지내다 보니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홍 씨는 “친구들이 만나자고 전화가 오면 ‘10년만 기다려 줘’라고 답한다”며 웃었다.

피겨는 부모들에게 ‘등골 브레이커’로 통한다. 운동을 시키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비유적 표현만은 아니다. 실제로 척추에 문제가 생긴 피겨 맘이 적지 않다. 보통 1년에 5만 km 정도를 운전해야 하는 데다 운전하지 않을 때도 차에 앉아서 기다릴 때가 대부분이다 보니 허리에 무리가 가는 것. 온종일 아이를 따라다녀야 하기 때문에 병원을 찾기도 쉽지 않다.

홍 씨도 허리 디스크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뒤에도 수술을 미루다 결국 지난해 3월 새벽에 병원에 실려 갔다. 수빈이까지 아이 셋을 낳은 홍 씨는 “출산 때보다 통증이 더 컸다”고 말했다. 홍 씨는 두 달가량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도 수빈이의 ‘라이딩’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⑥ 등교 수빈이는 훈련과 훈련 사이 학교에 가 수업을 듣는다. 학교보다 빙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다 보니 수빈이는 학교에도 피겨 훈련복을 입고 간다. 인천·과천=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임보미 기자

홍 씨는 “처음에는 아르바이트 직원을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운전사 업무라고 해도 새벽 4시에 일을 시작하는데 페이를 얼마나 드려야 하나, 스케줄이 펑크 나면 안 되는데 아르바이트로 일하시는 분이 매일 시간을 지켜주실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며 “결국 남편, 동생 등 온 가족이 돌아가면서 운전대를 잡았다. 정 안 될 때는 수빈이가 택시를 타고 이동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정근우는 선수 시절 ‘은퇴 후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은퇴 후 4년이 지나도록 프로야구 지도자 생활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왜 프로 지도자를 하지 않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근우는 “우리 딸 피겨 하잖아”라고 웃으며 답한다. 프로야구팀 지도자가 되면 연봉도 적을뿐더러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다.

정근우는 “아내가 오전에 픽업을 하면 나는 오후에 하는 식으로 분담하려고 노력한다. 은퇴 후 방송 일을 선택한 것도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가장 많이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아내도 본인 인생이 있는데 이렇게 반복되는 생활을 매일 이어가는 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가 도와줄 능력이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 아들 야구는 말렸는데 딸 피겨는 못 말리는 이유

⑦ 발레 교습 점프, 스핀, 스텝 시퀀스 같은 기술뿐 아니라 음악에 맞춰 손과 발, 몸짓, 표정으로 감정을 조화롭게 표현해야 하는 피겨 선수는 발레나 리듬체조 등으로 표현력과 코어 근육을 다지는 게 일반적이다. 인천·과천=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임보미 기자

정근우가 성공한 운동선수 출신이라 자식도 운동하기를 바란 건 아니다. 정근우는 야구를 하던 큰아들 재훈 군(16)에게는 야구를 그만두라고 먼저 권했다. 주변에서 ‘아빠가 정근우인데 왜 이렇게 빨리 그만두게 하냐’는 타박도 받았다. 하지만 정근우는 “내 아들인데 나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나. 그런데 열정도 노력도 크게 보이지 않더라. 자식이 인정받고 잘됐으면 하는 게 부모 마음이다. 한 번 사는 인생 더 잘하는 걸 찾길 바랐다”고 했다.

반면 수빈이는 선수 시절 ‘악바리’로 통했던 정근우에게도 합격점을 받을 만한 ‘근성’을 갖췄다. 정근우는 “우리 딸은 연습 도중에 콧물을 닦으러 펜스에 오가는 횟수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 현저히 적더라. 그래서 ‘너는 콧물이 안 나?’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 시간도 아깝다’고 답하더라. 나도 선수였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피겨 선수로 성공하려면 ‘다이어트’도 필수다. 수빈이는 새벽 빙상 훈련을 마친 7시 30분에 아침을 먹는다. 메뉴는 엄마표 ‘그릭 요거트’. 원래는 견과류 같은 토핑을 얹어 먹었지만 최근에는 체중 조절 때문에 요거트만 먹는다. 한창 먹성이 좋을 나이지만 더 먹고 싶다는 욕심 한번 내지 않는다.

정수빈(왼쪽)이 지난해 8월 경기 의정부 실내방상장에서 열린 교보생명컵 꿈나무체육대회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4급 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뒤 부모와 찍은 기념 사진. 정수빈 가족 제공

홍 씨는 “처음에는 남편도 저도 딸에게 ‘재미있게 하라’고만 했다. 야구로 따지면 초등학생은 이제 막 운동을 시작하는 단계이지 않나. ‘이 나이 때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라고 했었다”며 “처음에는 이렇게 힘든 운동을 하는데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코치님이 ‘여기까지 몸무게를 줄여 달라’고 하시면 ‘저 너무 죄책감 들어요’라고 했었다. 피겨의 특성을 몰랐었다”고 했다.

홍 씨 같은 피겨 맘들은 아이들을 기다리며 서로 “이거 왜 해요?”라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부모들은 “애가 안 그만둬서요”라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답’을 한다. 홍 씨는 경기를 마치고 온 남편의 저녁밥을 오후 11시가 넘어 챙겨준 뒤 다음 날 오전 8시에도 일어나기 힘들어했다. 그러나 이제 매일 새벽 4시 알람을 끄며 기적이 아닌 일상이 된 ‘미라클 모닝’을 연다.



인천·과천·안양=임보미 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