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부터 35년 효성그룹 이끌어 伊신혼여행 중에도 직원연수 참여 ‘섬유의 반도체’ 스판덱스 독자개발 美-日 기업인들과 활발한 교류 벌여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2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효성 제공
35년간 효성그룹을 이끌어 온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2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조 명예회장은 1982∼2017년 2대 회장으로 그룹을 이끌며 ‘기술경영’을 앞세워 한국 섬유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역이다. 고인이 회장 시절 내놓은 스판덱스 브랜드 ‘크레오라’와 타이어 코드(타이어 보강재)는 글로벌 시장 1위다.
1935년 경남 함안에서 효성그룹 창업주 고 조홍제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 1학년을 마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라 히비야고, 와세다대 이공학부를 졸업했다. 미국 일리노이대 공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중이던 1966년 부친의 부름을 받아 효성물산에 입사하며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고인은 효성그룹의 주력인 동양나이론, 동양폴리에스터, 효성중공업 등 그룹 주력 계열사들의 경영을 맡았다. 부친 조 창업주 회장이 별세하기 2년 전인 1982년 효성그룹 회장에 취임해 2017년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날 때까지 그룹을 경영했다.
‘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스판덱스는 조 명예회장이 축적 기술이 없던 상태에서 독자 개발을 결정했다. 효성은 1990년대 초 미국, 일본 등 일부 선진국만 보유하고 있던 스판덱스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이는 타이어 코드와 함께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효성의 대표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바탕으로 효성은 자동차·전기전자 분야에 사용할 수 있는 고강력 섬유소재 ‘폴리케톤’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기도 했다.
조 명예회장은 31·32대(2007∼2010년)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을 맡아 일자리 창출에 앞장서며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정부에 다양한 정책 제안을 해왔다. 전경련 회장 재임 당시 “물고기가 연못에서 평화롭게 노닐고 있는데 조약돌을 던지면 사라져버린다. 돈도 같은 성격이어서 상황이 불안하면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고 투자를 저해하는 각종 규제는 과감히 철폐되거나 시정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경협은 이날 류진 회장 명의의 추도사에서 “항상 ‘국민 모두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진정한 경제인이었다”고 추모했다.
고인은 풍부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미국, 일본, 중국 등의 주요 경제인과 활발한 협력 활동을 벌였다. 한미재계협회장, 한일경제인협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한중재계회의 등에서 30년 이상 경제협력을 지원했다. 고인은 2000년부터 한미재계회의를 통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공식 제기했다. FTA 체결 이후에는 미 의회를 찾아 협정 인준을 설득했으며, 한미 양국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 비자 면제가 필요하다고 미국을 설득하기도 했다.
조 명예회장은 소탈한 경영인으로도 손꼽혀 왔다. 대부분의 일정에 홀로 움직였다. 중국 귀국길에 마중 나온 임원들이 가방을 대신 들어주려고 하자 “내 가방은 내가 들 수 있고 당신들이 할 일은 이 가방에 전략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라고 한 이야기도 유명하다.
홍석호 기자 wil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