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당지도부, 지지층에 영합해 공천 지역민-지역구 의원 간 연결 고리 무시 시민 밀려나는 ‘청중민주주의’ 신호탄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선거 결과에 대한 다양한 예측들이 존재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선거 이후의 정치가 오늘의 정치에 비해 한 치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 악화될 것이라는 예상, 그리고 이에 누구나 동의한다는 점이다.
점보트론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선거운동원들을 제외한다면 선거가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말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없어 보인다. 선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내일의 정치를 만들어가는 여정이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연일 쏟아지는 여론조사와 예측의 홍수 속에서 선거는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기계적인 절차가 되어버렸고, 이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람이 칼에 찔리고 돌에 찍히는 정치 테러가 있었고,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특검, 기소, 처벌, 소송, 심지어 탄핵까지 선거 공약으로 운위되는 곳을 우리는 전장(戰場)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한창 치르고 있는 이들에게 “선거는 축제이자 과정”이라는 말처럼 뜬금없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번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현재까지 몇 가지 매우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 첫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정당의 리더십이 존재했다. 공천 과정을 포함한 선거의 전 과정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 지도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과감한 지휘권 행사가 있었고 거의 예외 없이 관철되었다.
둘째, 선거의 변곡점마다 정당들은 여론과 대중, 혹은 지지기반의 눈치를 살피고 이에 맞추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항상 성공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았지만 스캔들이 있는 후보자나 공직자들이 비교적 신속하게 여론의 압박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데, 이상과 같은 정당 지도부와 대중의 긴밀한 결합은 기존 정치질서(지역구)의 철저한 파괴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현역 의원 페널티로 상징되는, 혹은 지역구민보다 전체 당원이나 ‘전 국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구 경선을 통해, 지역구민들과 지역구 의원 사이의 대의 메커니즘이 결정적 타격을 입은 선거로 한국 의회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것을 포퓰리스트라 부르건, 청중민주주의(Audience Democracy)라 부르건, 그 핵심은 소속 정당에 뿌리가 깊지 않은 정당 지도부와 대중이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과정이 공천의 핵심이었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양대 거대 정당이 협업하듯 쌓아놓은 적대적 공생구조의 영속화 과정을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제3정당이나 무소속 출마자의 당선이 애초에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정치적 토양에서 중앙당의 일방적 공천 결정을 지역에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에서 배출된 초선 의원들이 과연 당내 민주주의 복원의 과제를 제대로 시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의 헌정질서가 만들어졌던 1987년으로 시간을 되돌려본다면 아마 누구나 “제대로 된 선거”가 민주주의의 핵심 요건이라고 말할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관철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의 핵심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 체제를 운영한 지 이제 4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선거라는 최소요건만으로는 우리 민주주의를 제대로 운영하기가 어려워진 것이 아닌가 걱정한다.
무대 위에는 한 편의 활극이 벌어지고 있고, 시민들은 객석으로 밀려나서 “더 많은” 참정권을 손가락과 스마트폰으로 행사하고 있는 곳. 그러나 이 연극이 끝난 후 그 다음 편이 시원찮아 보이면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연극을 기획하거나 극장을 리모델링할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이 청중이 아니라 사실은 이 극장과 운명을 같이할 진정한 주인이라면.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