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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에 심판받은 ‘21세기 술탄’… 튀르키예 지방선거 與 참패

입력 | 2024-04-02 03:00:00

이스탄불 등 5대 도시서 모두 패배… 60%대 물가-반대파 탄압 등에 반발
작년 3선 성공한 에르도안 큰 타격
‘에르도안과 닮은꼴’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연임 ‘차기 주자’로



野 시장 승리 환호하는 이스탄불 시민들 지난해 5월 3선에 성공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터키) 대통령이 중간평가 성격인 지난달 31일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격전지로 꼽혔던 최대 도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도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의 에크렘 이마모을루 현 시장이 승리했다. 이날 이마모을루 시장의 지지자들이 시청 앞에서 국기를 흔들며 야권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이스탄불=AP 뉴시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국민 결정을 존중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이스탄불에 새 시대가 열렸다. 평화, 민주주의 속에 숨쉴 것이다.”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지난달 31일 치러진 튀르키예(터키) 지방선거에서 집권 정의개발당(AKP)이 최대 도시 이스탄불, 행정 수도 앙카라 등 주요 도시에서 참패했다. 지난해 5월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하며 최장 2033년까지 장기집권의 길을 연 ‘21세기 술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70)이 2003년 집권 후 가장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집권당의 참패 요인으로 2월 기준 전년 동월 대비 67%에 달하는 소비자물가 상승률, 만성적인 경제난, 지난해 초 대지진의 더딘 복구 속도, 반대파 탄압으로 일관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대한 반발 등이 꼽힌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선거 직전 ‘정계 은퇴’까지 시사하며 배수진을 쳤지만 돌아선 민심을 붙잡지 못했다.

특히 이스탄불 시장 연임을 확정한 제1야당 공화인민당(CHP) 소속 에크렘 이마모을루 시장(53)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일각에서는 2028년 대선에서 그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이길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 ‘경제난 심판’ 못 피한 에르도안

에르도안 대통령

국영 TRT방송, 아나돌루통신 등에 따르면 1일 대부분의 개표를 마친 가운데 CHP 소속 후보들은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 등 5대 도시 시장 선거에서 모두 AKP 후보를 이겼다. CHP의 전국 득표율 또한 37.2%로 AKP(35.6%)를 앞섰다.

특히 총인구 5분의 1인 약 1600만 명이 거주하고, 국내총생산(GDP)의 30%를 담당하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는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강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스탄불 외곽에서 출생했고, 이곳에서 시장을 지냈다. 이에 그가 ‘정치적 고향’에서 승리하기 위해 각별한 공을 들였지만 이마모을루 시장이 51.1%를 얻어 무라트 쿠룸 AKP 후보를 약 10%포인트 차로 눌렀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10개월 전 대선에서 승리했을 때만 해도 종신 집권할 수 있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고물가, 리라 가치 급락, 고실업 등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하자 민심이 빠르게 돌아섰다. 에르도안 정권은 집권 내내 핵심 지지층인 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저금리를 유지했다. 이로 인한 살인적 물가에 지난해부터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지만 고물가를 잡기는커녕 고금리에 취약한 서민 불만만 되레 높아졌다.

지난해 초 남동부에서 발생한 강지진도 반(反)에르도안 여론을 키웠다. 원래 에르도안 정권의 텃밭으로 꼽히는 지역이었지만 졸속 경제성장을 추진하기 위해 내진 설계가 부실한 건물의 공사 승인을 남발한 것이 지진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 ‘대항마’ 입지 굳힌 이마모을루

이마모을루 시장 

선거의 최대 승자로 이마모을루 시장이 꼽힌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1일 시청 앞에서 지지자를 향해 “새 시대가 열렸다”고 외쳤다. 지지자들은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로이터통신은 에르도안 대통령과 이마모을루 시장의 공통점에 주목했다. 둘 다 이스탄불 시장을 지내며 전국적 정치인으로 발돋움했고 젊은 시절 축구 선수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받은 징역형 선고가 열성 지지층의 결집으로 이어진 점도 같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스탄불 시장 시절인 1997년 튀르키예 극우주의자의 시를 낭송해 종교적 증오를 부추겼다며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고 4개월을 복역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또한 2019년 첫 시장 선거 당시 반대파를 ‘바보(fools)’로 칭해 1심에서 2년 7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했고 아직 항소심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 에르도안 정권이 항소법원의 판결에 영향력을 행사해 이마모을루 시장에게 제동을 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마모을루 시장이 이 같은 정치적 이력을 바탕으로 2028년 대선에서 직접 출마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반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선거의 압도적 패배로 2028년 대선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위태롭게 됐다. 로이터는 “이번 선거는 튀르키예의 분열된 정치 지형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신호탄”이라고 평가했다.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