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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재조합해 마치 신약처럼 지독한 결핵 내성균 잡았다

입력 | 2024-04-05 03:00:00

미국 연구팀, 암-고혈압 약 결합… 악성 결핵균 죽이는 치료제 개발
‘아프리카 수면병’약, 당뇨병 치료
간질 부작용에 퇴출된 폐암 약은 돌연변이 유전자 치료제로 부활
국내도 약물 재조합 AI 연구 활발… “약물 가능성 80%가 잠들어 있어”



기존에 승인된 약물에서 새로운 효과를 찾아내는 ‘약물 재창출’ 사례가 최근 활발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세계 의료계 ‘약물의 재발견’ 바람



한국은 2022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후진국병으로 여겨지는 결핵 환자 발생 수 1위, 사망률 3위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결핵균 감염으로 생기는 결핵은 항균제 등 치료 약물이 있지만 기존 항균제에 내성이 생긴 악성 결핵균이 골칫거리다.

미국 과학자들이 실제 의료 현장에서 잘 쓰이지 않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던 약물을 재조합해 악성 결핵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기존에 쓰이던 약물의 새로운 효과를 확인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약물 재창출’ 사례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 기존 치료제 안 듣는 결핵균 치료 효과 대폭 향상

라케시 자인 미국 하버드대 의대 부속 매사추세츠종합병원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가장 강력한 항균제조차 듣지 않던 악성 결핵균을 죽이는 데 도움이 되는 치료 약물을 개발하고 지난달 28일 국제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연구팀이 개발한 치료 약물은 종양의 성장에 필요한 혈관 형성을 억제하는 약물인 ‘베바시주맙’과 고혈압 환자의 체내 수분량을 줄여 혈압을 낮추는 약물 ‘로사르탄’을 토대로 탄생했다. 두 약물을 결합하자 약물을 받아들이는 표적의 반응이 촉진되면서 치료 효과가 대폭 향상됐다.

연구팀은 “보건당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두 약물은 안전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해 결핵 환자들의 치료 결과를 크게 개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에서 매년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초래하는 질병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기존 약물을 바탕으로 한 약물 재창출 전략으로 제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 다양한 질환에 약물 재창출 전략 통해


약물 재창출 전략을 통한 새로운 치료제 발견은 최근 잇따르고 있다. 미국 인디애나대 의대 연구팀은 지난해 11월 국제학술지 ‘셀 리포츠 메디신’에 당초 아프리카 수면병 치료제로 개발된 약물 ‘디플루오로메틸오르니틴’이 제1형 당뇨병 환자의 인슐린 생산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디플루오로메틸오르니틴은 1990년대 아프리카 수면병에 대한 치료제로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2020년에는 특정한 신경 조직에서 형성되는 암인 신경아세포종에 대한 치료 효과가 확인됐다.

연구팀이 이 약물이 체내에 작용할 때 세포의 대사작용을 촉진하고 보호한다는 점에 주목해 인슐린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포 보호에 활용했다. 이어진 동물 실험에선 이 약물이 세포를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회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까지 확인됐다.

폐에 상대적으로 커다란 종양이 생기는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중 가장 널리 쓰이는 다국적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의 ‘이레사’도 약물 채창출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레사의 성분인 게피티니브는 처음 개발됐을 때 서구권 국가에서 실시된 임상시험에서 간질 같은 부작용이 발생하면서 사장됐다. 이후 일본에서 진행된 임상시험에서 부작용 없이 높은 치료 효과를 보이며 동양인을 대상으로 한 폐암 치료제로 각광받게 됐다. 동양인에게서만 많이 발생하는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돌연변이 유전자에 효과를 가진 사실이 새롭게 확인된 것이다.

● 국내에서도 연구 활발


국내에서도 약물 재창출 성공 사례를 만들기 위한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이현숙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이끄는 바이오인공지능연구단은 각 약물의 효과를 재조합하거나 기존 용도와 다른 질병에 사용했을 때 기대되는 효과를 예측하는 인공지능(AI) 플랫폼을 모색하고 있다.

이 교수는 “현재 승인된 약물의 70∼80%는 사실상 잠들어 있다”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약물의 새로운 효과를 찾는 것은 치료 효과는 물론이고 시간과 비용에 대한 경제적 측면에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존 신약 개발은 표적 발굴부터 후보 물질 선별 등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데 비해 약물 재창출은 화합물 규명, 획득 그리고 개발과 등록까지 3년 내에도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안전성이 입증된 약물을 활용하기 때문에 성공률도 높다. 이 교수는 “잠들어 있는 약물의 효과를 확인하는 것은 이미 국내외 학계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며 “앞으로 약물 재창출 연구 경쟁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정연 동아사이언스 기자 hes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