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아래 설치된 무명용사를 추모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 사진 출처 EUROPE1 홈페이지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지난달 김경수 씨(83)는 대구 강북소방서를 찾아 5억 원을 기부했다. 26년 전 폭우로 불어난 강에서 실종된 중학생들을 수색하다 순직한 소방관 아들(김기범 소방교·당시 26세)의 이름을 딴 장학기금을 내놓은 것. 김 씨는 아들이 남긴 유족연금과 평생 검소한 생활로 모은 돈을 국가유공자 후손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달라면서 “아들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제복공직자(MIU)였던 아들의 숭고한 희생이 잊히지 않고, 우리의 일상에서 살아 숨 쉬길 바라는 애틋한 부성애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 유족의 심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전에서 산화한 55용사를 기리는 ‘서해 수호의 날’(매년 3월 넷째 주 금요일)처럼 해마다 특정일에 호국영웅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지만 여전히 국민의 일상과 괴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 시기만 지나면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대한민국을 지키다 산화한 부모 형제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은 오롯이 유족의 몫으로 남는다.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의 ‘목발 경품’ 발언처럼 북한의 도발로 중상을 입은 군 장병을 비하하고, 그 가족들의 상처를 헤집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호국보훈의 불꽃은 10여 년 전 여론의 호응 속에 추진되다 흐지부지된 전례가 있다. 2011년 당시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불꽃 시설의 건립 장소로 결정하고, 그다음 해 현충일에 맞춰 점화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의 ‘영원한 불꽃’, 프랑스 파리 개선문 광장의 ‘추모의 불꽃’처럼 나라에 헌신한 영웅이나 전사자를 기리는 현충 시설을 국민의 일상 공간에 설치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해 말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건립 장소의 적절성을 둘러싼 여야 논쟁이 벌어진 끝에 건립 장소를 재검토하기로 결론 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관련 예산도 대부분 삭감되면서 불꽃의 점화 계획도 1년 미뤄졌다.
그다음 해에도 답보 상태는 계속됐다. 2012년 보훈처는 전국 10만여 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투표와 설문 조사를 거쳐 광화문 광장을 불꽃 시설 후보지로 최종 선정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광장 관할권을 가진 서울시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서울시는 불꽃 시설이 광화문 광장 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 등 기존 조형물과 어울리지 않고,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댔다. 서울시 내부에서는 남산 봉수대 등 제3의 장소를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서울시의 관련 자문위원회에 참여한 진보성향의 시민단체 인사는 “국가 전체주의적 상징물을 왜 광화문 광장에 건립하느냐”면서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건립 장소를 찾지 못해 불꽃 시설 건립사업은 제자리걸음을 하다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보훈부 관계자는 “호국보훈의 불꽃 사업이 무산된 전례를 돌아보면 매년 기념일에만 반짝하고 사그라드는 보훈 문화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고 말했다.
호국보훈의 불꽃 앞에서 영국의 근위병 교대식과 같은 상징적 이벤트가 연중 개최된다면 광화문 광장은 호국보훈의 ‘랜드마크’이자 관광 명소로도 거듭날 것이다. 대한민국을 보훈 선진국으로 세계에 각인시키는 한편 국민 통합의 구심점도 될 수 있다. 정부 당국이 호국보훈의 불꽃 건립 재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서 주길 기대한다. 마음 같아서는 내년 현충일에 광화문 광장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보고 싶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