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반도체 규제 피해보는 한국] 中, 자급률 높이며 韓장비 줄여 韓 수출 20% 줄고 美는 3% 감소 日 4% 증가, 네덜란드 150% 폭증
미국이 2022년 10월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한 이후 주요 반도체 장비 생산국 가운데 한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은 소폭 감소에 그쳤고 규제에 동참한 일본과 네덜란드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은 오히려 증가했다. 하지만 아직 규제에 동참하지 않은 한국의 장비 수출량은 20% 넘게 줄었다. 중국이 규제 확대를 우려해 미리 레거시(범용) 장비를 사들이고 자급률을 높이는 과정에서 기술력이 상대적으로 뒤지는 한국산 장비가 배제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8일 동아일보가 유엔 무역통계를 통해 지난해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액을 집계한 결과, 한국산 장비 수입액은 44억7609만 달러(약 6조 원)로 2022년(56억1937만 달러) 대비 20.3% 감소했다. 노광, 세정, 식각, 증착, 검사 등 반도체 장비에 해당하는 19개 국제품목분류코드(HS코드)를 분석한 결과다.
中, 美 규제 피해 반도체 국산화… ‘대체 가능’ 韓 장비 수출 급감
[美 반도체 규제 피해보는 한국]
中, 기술 우위 선진국 장비 사재기… 네덜란드-美-日 기업 中 매출 껑충
일부 ‘범용’ 속여 우회 수출 의혹도
“中기술대체 쉬운 한국산 수요 감소… 장비산업 경쟁력 키워야 낙오 면해”
中, 기술 우위 선진국 장비 사재기… 네덜란드-美-日 기업 中 매출 껑충
일부 ‘범용’ 속여 우회 수출 의혹도
“中기술대체 쉬운 한국산 수요 감소… 장비산업 경쟁력 키워야 낙오 면해”
“결국 중국에서 미국, 일본, 네덜란드 장비 회사들의 영향력만 키우는 결과가 됐습니다. 그동안 중국 수출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봤죠.”
8일 국내 한 반도체 증착(蒸着) 장비 기업 대표는 한숨을 쉬며 이같이 말했다. 아직 한국은 공식적으로 미국의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에 동참하지 않았다. 심지어 국내 기업이 중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장비는 첨단이 아닌 레거시(범용) 장비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액은 1년 만에 20% 넘게 뚝 떨어졌다.
중국이 반도체 국산화에 나서면서 기술력이 뒤처진 한국 장비가 먼저 대체된 영향이 가장 크다. 국내 업체들의 주요 공급처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내 투자를 줄인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일각에선 일부 해외 기업들이 중국이 수입한 장비를 첨단 공정에 사용할 것을 알면서도 범용 공정에 사용한다며 목적을 둔갑시켜 우회 수출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글로벌 주요 장비 기업들의 중국 매출 비중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미국 최대 반도체 장비업체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스는 지난해 회계연도 기준 4분기(8∼10월) 전체 매출에서 중국 비중이 44%였다. 수출 규제가 적용되지 않았던 2022년 같은 시기(20%) 대비 2배 이상으로 뛰었다. 미국 램리서치와 일본 도쿄일렉트론도 지난해 3분기(7∼9월) 중국 매출 비중이 각각 48%, 43%로 2022년 동기보다 18%포인트씩 증가했다.
● 삼성·SK의 대중 투자 감소도 영향
일부 해외 기업들이 규제 사각지대를 이용해 수익을 냈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된다. 지난해 말 미 연방의회 산하 자문기구인 미중경제안보검토위원회(USCC)는 연례보고서에서 “미국의 장비 규제가 (중국 견제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며 딜런 파텔 반도체 분석가의 주장을 인용했다. “장비 회사들은 웬만한 장비는 중국에 판매하고 있다. (첨단 공정인) 5나노를 위한 증착, 식각, 세척, 코팅 등의 장비들은 28나노에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USCC는 그러면서 “(중국) 수입업자들이 레거시 장비에 사용될 것이라고 주장하면 수입이 가능하다”며 “실제 해당 장비가 첨단 공정에 사용되는지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 최대 반도체 장비 회사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스는 지난해 말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 SMIC에 장비를 우회 수출한 혐의로 미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SMIC는 지난해 화웨이에서 설계한 7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급 칩 생산에 성공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 회사다.
전문가들은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결국 국내 장비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아무리 반도체 제조 강국이더라도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포함한 반도체 생태계를 단단히 갖추지 못하면 국제 정세에 더 쉽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글로벌 10대 장비 회사는 미국, 일본, 네덜란드 기업들이 모두 독차지하고 국내 기업은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한 반도체 장비 회사 사장은 “네덜란드도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와 같은 독보적인 기술력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현익 기자 bee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