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는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보건의료 정책이 이렇게 주목받은 적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의료계 일각에선 ‘총선이 끝날 때까지만 버티자’는 기류도 있다고 합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 계획을 철회하거나 대폭 물러선 수정안을 내놓을 거란 기대겠죠. 다른 쪽에선 야당 대다수도 의대 증원에 반대하지 않는 만큼 총선 결과가 큰 영향이 없을 거란 분석도 나옵니다.
어느 쪽이든, 의료계와 정부 둘 다 ‘2000명’의 대안을 먼저 제시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건 명백합니다. 정부·여당은 “2000명이라는 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면서도 어떤 조건에서 이를 조정할 수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의사 단체도 “2000명은 너무 많다”면서도 대안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대치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을 사고팔 때 “당신이 먼저 원하는 가격을 제시하지 않으면 거래하지 않겠다”며 서로 버티는 것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부와 의료계가 서로 ‘당신이 생각하는 적정한 의대 증원 규모를 먼저 말해보라’며 기 싸움을 하는 모습은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을 거래할 때 유리한 가격을 유도하기 위해 ‘선(先)제시’를 요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이들을 인터뷰한 건 다양한 필수의료 정책이 입법으로 현실화할 22대 국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는 소속 정당을 대표하지 않는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진행했지만, 각 직역을 대표해 선발됐고 상당수가 당선권인 만큼 지금 이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봤습니다.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를 내지 않았거나 비례대표가 일정상 인터뷰에 응하지 못한 원내정당 3곳(새로운미래, 자유통일당, 진보당)에는 각 정당의 공식 입장을 물어서 답변받았습니다.
● 비례대표 5명 중 4명은 “의대 증원 필요”
다른 원내정당 3곳은 모두 의대 증원에 찬성했습니다. 새로운미래는 향후 10년간 매년 의대 정원을 전년 대비 15~20% 늘리고 주기적으로 평가해 조정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연평균 500~600명을 늘리자는 겁니다. 자유통일당은 5년간 2000명 증원하거나 10년간 1000명 증원해 ‘10년간 총 1만 명 증원’ 방안을 내놨습니다. 진보당은 최소 1000명 증원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더 늘려야 한다고 봤습니다.
● “의대 증원, 사회적 대화기구서 논의하고 의사들도 참여해야”
의료공백 혼란의 책임이 정부와 의료계 중 어느 쪽에 더 무거운지는 응답자마다 의견이 갈렸지만, 공통으로 나온 답변은 “의료계가 정부의 대화 제의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선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 5명뿐 아니라 나머지 원내정당 3곳의 공식 입장이 일치했습니다.새로운미래와 진보당도 시민사회가 포함된 사회적 대타협(논의) 기구를 설치해 의대 증원을 포함한 종합 로드맵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 필요한 정책 1위는 ‘필수의료 보상 강화’-‘공공병원 확충’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필수의료 보상 강화’와 ‘공공병원 확충’이었습니다. 둘 다 4명(곳)이 꼽았습니다. 늘어난 의사를 필수의료 분야로 유인하려면 해당 분야의 건강보험 수가를 높이는 등 보상을 강화하고, 공공병원을 늘려 의료에 대한 정부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공공병원 확충의 경우 나순자 전 위원장과 김선민 전 원장 등이 찬성했습니다. 나 전 위원장은 “전국 70개 중진료권마다 500병상 이상의 선진국형 공공병원(지역책임의료기관)을 지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 전 원장은 “인구소멸 지역 등 시장실패가 일어나는 지역에 공공병원을 확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새로운미래는 현재 병상 과잉인 상황을 고려해 지역 민간병원을 국가가 인수해 공공병원으로 운영하는 방식을, 진보당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대상에 공공병원을 추가하는 방식을 각각 제시했습니다.
● ‘노인 돌봄부터 해결’ 제안이 주목되는 이유
비례대표 3명이 공통으로 꼽은 ‘간병 등 노인돌봄 체계 정비’에 주목합니다. ‘필수의료’라고 하면 흔히 심뇌혈관 수술이나 중증외상 치료, 응급 분만 등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저는 노인돌봄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앞으로 필수의료도 가망이 없다는 시각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급속한 고령화 때문입니다. 노인 환자 대다수가 생애 말기 몇 년간 간병을 받다가 요양시설에서 숨을 거두는 현 구조라면 의사를 아무리 늘린들 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임종을 앞둔 노인 암 환자에게 1년 동안 투입되는 ‘생애 말기 1년’ 의료비가 평균 4000만 원이 넘는다는 연구(2016~2019년) 결과가 있습니다. 멀리서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주변에 지병이나 노환으로 거동이 어려운 어르신 한 분 정도는 있지 않으신가요? 아마 가족 중 한 분은 벌이를 포기하고 어르신을 돌보거나 전문 간병인을 고용하느라 한 달에 200만 원 안팎을 지출하실 겁니다. 그런데 국내 80세 이상 인구가 올해 238만 명에서 2054년 829만 명으로 3.5배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됩니다. 전 세계에 자랑하는 우리의 우수한 건강보험도 머잖아 한계를 맞게 될 겁니다.
지난해 8월 16일 치매 환자 김옥단 씨(88·왼쪽)가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강서구치매안심센터 소속 작업치료사와 함께 TV를 보며 인지 기능에 도움이 되는 운동 동작을 따라 하고 있습니다. 이 센터는 지난해 관내 치매 환자 36명을 선별해 주 1회 방문 서비스를 했습니다. 이런 밀착 관리가 아니었다면 상태가 악화해 요양시설에 입소할 가능성이 작지 않았던 환자들입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지역 의료기관 협력 네트워크 구축’을 필수의료 대책으로 꼽은 비례대표와 정당도 3명(곳)이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정책입니다. 김윤 교수는 “지역 내 병원끼리 경쟁이 아닌 협력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해당 지역 병·의원이 다 보상받는 식으로 틀을 다시 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지아 교수도 “지역 내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네트워크와 협력 체계 구축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여론의 관심은 한정된 자원입니다. 초고령사회를 앞두고 보건의료 분야에서 개혁할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의대 증원은 그중 아주 작은 조각 하나일 뿐입니다. 거기 매몰돼 흘려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도 아깝습니다. 이걸 가장 아까워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정부와 의료계입니다. 의료계가 전문적인 식견을 보태고 정부가 이를 세밀하게 조율해 나가야 할 과제가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만에 하나 의료계 일부 강경파의 주장대로 의대 정원을 동결한다고 칩시다. 그럼 과연 여론이 다른 보건의료 분야의 개혁은 용인할까요. 의료소송 부담을 완화하는 제도가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건강보험료율의 법정 상한(8%)을 높이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집단으로 사직서를 낸 전공의들의 7대 요구안 중 첫 번째가 ‘의대 증원 계획 및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전면 백지화’라고 합니다. 어떤 소설에 나온 말처럼 심지가 심지로 남고 초가 초로 남아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