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영동 ‘둘이파전’집의 모둠전과 살얼음 막걸리. 김도언 소설가 제공
시인 L은 삶이란 가전제품이 하나씩 늘어가는 것이라고 시편에서 말한 적 있다. 나는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변용해 봤는데, 삶이란 먹어본 음식의 가짓수가 늘어가는 것이라고. 나는 이 말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10대 중에서 홍어삼합을 먹어본 이들의 퍼센티지가 50대 중에서 홍어삼합을 먹어본 이의 그것보다는 낮을 테니 말이다. 어려서부터 산낙지를 먹는 아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먹어야 하는 게 있는 법이다. 어쩌면 노포는 이런 쇄말적인 개인의 연혁을 가장 자연스럽게 채워주는 공간일 것이다.
김도언 소설가
함께한 소설가 S 선생과 더불어 흐린 날 학사주점을 닮은 노포 전집에서 세 명의 글쟁이들이 바란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 한 가지였으니 비의 강림이었다. 막걸리는 살얼음이 녹을 새 없이 금세 비워졌고 소설가들의 이야기도 구성졌다. 문단에서 서로 좋아했다가 헤어진 사람들 이야기, 원고지 밖으로 너무 멀리 나간 작가들 근황으로 분주했다. 그러다 막걸리 주전자가 다섯 개쯤 비워졌을 때였을까.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기적 같은, 축복 같은 비였다. 웃자란 소설가 셋이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내질렀다. 어느 순간엔 비가 내려서 전과 막걸리를 먹고 있는 건지, 전과 막걸리를 먹어서 비가 오는 건지 대관절 무심해지고 말았다. 거기에 젊은 손님들은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조근조근 술을 마셨다. 빗소리를 삼키기라도 할까 봐 목소리를 낮추고 잔을 나눴다. 나는 이게 이 집이 만든 풍속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오는 저녁이면 남영동 전집엘 가보자. 누구든 이곳에서 홀로 그윽해지거나 연인 또는 친구와 깊이 사무칠 수 있다. 그윽해지거나 사무칠 수 있는 곳, 말하자면 거기가 노포다.
김도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