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신경 안 써도, 책 많이 읽어도 “페미” 이혼소송 남편들 “아내가 페미라” 낙인 혐오 용인 문화가 갈등과 분열 부추겨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SF작가
한 위원회에서 나에 대한 기피신청이 들어왔다. 기피신청이란 특정 위원이 공정한 판단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한 민원인이 해당 위원을 판단에서 배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기피 사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터라 당혹스러웠다. 기피 신청서를 읽어보았다. 민원인은 사용자들이 누구나 자유롭게 내용을 작성하는 온라인 사이트에서 나를 설명한 항목을 저장한 사진을 출력해 입증자료로 첨부하며 ‘정소연 변호사는 극단주의 사상인 페미를 믿는 사람이니 공정한 판단을 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해당 사건의 쟁점은 성별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이혼소송을 하다 보면 남편 쪽에서 아내의 잘못으로 ‘페미라서’를 드는 경우가 너무 많아, 예를 들어도 누구 일인지 알아볼 사람도 없을 정도다. “내 아내가 남자아이를 평등하게 키우는 방법에 대한 책을 읽었다. 아들을 똑바로 키우지 못할 사람이니 양육권을 주면 안 된다” “딸의 인권에 대한 책을 아내의 책장에서 발견했다. 우리 딸의 사상을 왜곡시킬 것이다”와 같은 주장을 하며 양육권을 다투는 남편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일면식 없는 쇼트컷 여성을 “페미이니 맞아야 한다”며 폭행해 중상에 이르게 한 범죄도 발생했다. 오늘날 ‘페미’는 사전적 의미의 페미니스트 또는 여성주의자의 약칭에 그치지 않고, 페미니스트에 대한 멸칭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둘째, 머리가 짧고 뚱뚱하고 외모와 꾸밈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 애인, 아내, 가족 등 내 주변 여성은 페미일 리가 없다. 긴 생머리이고 화장하고 날씬하니까. 이 기준으로 얼마나 많은 남성이 놀랍고도 손쉽게 ‘페미성’을 획득하는지는 알 바 아니다. 페미 여부 판별은 오로지 남자인 내가 여자를 평가하는 일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셋째, 페미는 독서를 많이 한다. 베스트셀러였던 ‘82년생 김지영’ 외에도, 위에서 예로 든 것 같은 성평등 교육을 위한 책, 여성주의자들의 학술서,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 따위를 읽는다. 이런 페미들은 티를 내기 마련인데, 남자인 내 앞에서 감히 똑똑한 척을 하거나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말의 예는 “임신과 출산은 여성에게 더 불이익하다”부터 “성범죄를 예방하려면 남자아이들의 성교육이 중요하다” “명절에 왜 꼭 시가를 먼저 가야 하냐” 등이 있다.
그 외에, 집게손가락 손 모양이나 이모티콘을 사용하거나(남성의 성기가 매우 작다는 의미라고 한다. 저런, 그랬구나!) 데이트통장 만들기를 거부하거나 흡연하거나 성별 동일임금을 주장하거나 살림을 싫어하는 여자들도 페미임을 숨기고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저것 종합해 보면, 한국에서는 여자로 태어나 숨만 쉬어도 페미가 될 수 있다.
페미에 대한 감별, 혐오 발화에 대한 용인과 때로는 심지어 이를 부추기는 문화가 결국 원인을 잘못 이해한 개인들의 불행, 가정의 갈등과 분열, 사회적 비용, 심지어 범죄로 이어져 우리 모두의 짐이 되는 현실을 보며 생각한다. 어차피 저 모든 기준을 갖다 대면 한국의 모든 여성이 페미이고, 지금이야말로 혐오가 완성한 대페미의 시대인 것을.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SF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