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선진국’ 유럽마저 저출산 공포… 10년 연속 EU 출산율 1위 프랑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저치 직면… 유급 출산휴가 늘리고 난임 지원 이탈리아는 근본적 해법 부족 비판… 여성 고용 아우른 ‘헝가리 모델’ 주목 경제활동인구 줄면 재정 기반 ‘흔들’… 저출산發 재정난 올까 위기감 만연
《유럽도 저출산, 육아휴직 확대 등 긴급 처방
유럽마저 저출산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프랑스나 영국 등도 최근 합계출산율이 가파르게 떨어지는 추세다. 육아휴직 확대 등 긴급 대책을 내놓고 있으나 회복이 쉽지 않아 위기감이 감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가운데)이 지난해 4월 프랑스 파리 인근 클라마르에 있는 한 경기장에서 아이들을 포옹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올해 출산휴가를 확대하고 난임 퇴치 대책을 내놓기로 했다. 클라마르=AP 뉴시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올해 1월 기자회견에서 이례적으로 자국의 저출산에 대해 우려를 드러냈다. 프랑스는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10년 연속 ‘출산율 1위’를 지켜온 나라다. 그런 프랑스마저 저출산 위기감을 표하는 게 생경하지만, 그만큼 현 상황을 허투루 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프랑스 통계청(INSEE)에 따르면 지난해 프랑스에서 태어난 아이는 67만8000명.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최저치다. 출생아 수는 2020년 정점을 찍은 뒤 3년간 20%나 감소했다.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도 2022년 1.79명에서 2023년 1.68명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됐다. 현지 매체들은 “프랑스는 수십 년간 출산율 붕괴를 피해 왔지만 더 이상 안심할 수준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 아빠 휴직 늘리고 생후 9개월 돌봄도
유럽 국가들이 내놓는 해법은 대체로 육아를 위한 유급 휴가나 휴직을 연장하는 방안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1월 기자회견 당시 “출산휴가를 16주에서 6개월로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경력 단절과 낮은 수당 탓에 육아휴직을 기피해 온 부모들을 위한 대책이다.
프랑스는 최대 3년 동안 육아휴직을 쓸 수 있지만, 여성이 휴직 기간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는 데다 월 지원금도 428.7유로(약 63만 원)로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출산 전후 6개월간 주어지는 출산휴가가 훨씬 실효성이 크다는 판단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또 “최근 남녀 모두 난임이 급격히 증가해 많은 커플이 고통받고 있다”며 대대적인 난임 지원 정책도 예고했다.
이웃 국가인 독일에선 올해 ‘아빠 육아휴직’ 확대로 저출산과 맞서고 있다. 독일은 지난해까지는 총 14개월의 육아휴직을 부모가 나눠서 쓰도록 돼 있었다. 엄마가 육아휴직을 8개월 쓰면, 아빠는 나머지 6개월을 쓰는 식이다. 하지만 올해부턴 부모가 동시에 한 달간 휴직할 수 있다. 자녀가 두 명 이상이라면 동시 휴직 기간은 더 길어진다. 게다가 아빠들은 올해부터 유급 휴가 10일도 따로 받게 됐다. 해당 휴가를 써도 전체 유급 휴직 기간이 줄어들지 않는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사진 가운데)가 2일 영국 북동부 하틀풀에 있는 보육원에서 한 아이가 보여주는 꽃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다. 영국은 이달부터 2세 아동에게 주 15시간의 무상 보육을 제공하기로 했다. 하틀풀=AP 뉴시스
영국이 선택한 해법은 무상보육 기간 확장이다. 출산 직후뿐 아니라 보육 기간 내내 국가가 아이를 돌봐주는 기간을 늘려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돕겠다는 취지다. 기존엔 3, 4세 유아를 둔 일정 소득 이하의 맞벌이 부부만 주 30시간의 무상보육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올해 4월부터는 2세 유아를 둔 부부도 주 15시간 무상보육 서비스를 받는다. 내년 9월부턴 생후 9개월에서 취학 연령 사이의 자녀를 둔 부부도 주 30시간의 보육 서비스를 받는 것으로 확대된다. 정부는 이를 위해 관련 시설을 15% 늘리고 아이 돌보는 인력의 시급도 인상할 계획이다.
● 伊, 종합 가족정책 ‘헝가리 모델’ 주목
이탈리아는 유럽에선 출산 후진국으로 꼽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출산율이 한국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을 정도다. 최근엔 더 심각해졌다. 합계출산율이 2022년 1.24명에서 지난해 1.20명으로 더 줄어버렸다. 출생아 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5년 연속 감소해 2023년 34만9000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최저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최근 행정부처인 가족부를 ‘가족·출생·기회평등부’로 이름을 바꿨다. 이와 함께 육아용품 부가가치세 인하, 급여 80%에 준하는 수당이 지급되는 육아휴직 기간 연장 등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다.
멜로니 총리가 자주 헝가리를 “완벽한 사례”라며 거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헝가리는 합계출산율이 2010년 1.21명에서 2022년 1.56명으로 오히려 높아졌다. 출산율 반등의 비결로는 2010년부터 시행한 종합적인 가족 정책이 핵심으로 꼽힌다.
헝가리 정부는 진작부터 저출산의 원인이 ‘주거 및 생활비 부담’과 ‘여성의 경력단절 우려’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부모에게 육아휴직을 최대 3년 제공하고, 육아 뒤 업무에 복귀하는 여성에게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가족세 공제’ 혜택으로 3명 이상 자녀를 둔 맞벌이 부모에겐 소득세를 면제해 줬다. 헝가리 어린이집에선 아이에게 하루 네 끼 무료 식사도 제공한다. 자녀가 3명 이상인 가족에게 최대 3만3000유로(약 4860만 원)의 주택자금도 지원한다.
흥미로운 건 이탈리아가 유럽의 대표적 저출산 국가지만, 북부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지역은 국가 평균을 훨씬 웃도는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1년 기준 이 지역 합계출산율은 1.57명으로 전국에서 1위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의 일회성 아동수당을 뛰어넘는 ‘가족 친화적인 정책’으로 수십 년간 출산율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비결을 소개했다.
실제로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지방정부는 국가가 지급하는 아동수당 외에도 추가 수당을 지급한다.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니다. 지방정부는 자녀가 3명 이상인 가족에게 ‘패밀리 플러스’ 카드를 발급하며, 주민들은 이 카드로 생활용품을 20%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해당 카드는 유통 프랜차이즈 ‘데스파르’와 연계돼 추가 할인도 적용된다. 대중교통은 물론 전기료나 방과 후 활동비 등을 결제할 때도 할인받을 수 있다.
인구통계학자인 아녜세 비탈리 트렌토대 부교수는 NYT에 “뻔한 일회성 정책에 혹해서 출산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며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정책이 여타 지역과 다른 점은 단발로 그치지 않고 수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투자를 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저출산은 정말 뒤집기가 어렵다”
일각에선 남유럽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재정위기 때의 트라우마가 작용했단 분석이 나온다. 그리스는 2010∼2015년 세 차례에 걸쳐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의 구제금융을 받으며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쳤다. 당시 연금 수급자들은 연금 지급액이 최대 50%가량 삭감되는 아픔을 겪었다.
저출산은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로 직결된다. 이는 나라 곳간이 휑해져 국가 재정 기반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웃 PIGS 국가들이 무너진 국가 재정에 혹독한 고통을 겪는 상황을 지켜본 그들로선 또 다른 혼란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가 “저출산은 연금에 대한 국가적 위협이자 시한폭탄”이라고 경고한 이유다.
문제는 유럽 각국이 내놓는 처방들이 아무리 획기적이어도 한 번 꺾인 저출산 흐름을 막아내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재정 위기를 훌륭하게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리스조차 출산율만은 이전만큼 회복하질 못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10일 “그리스는 저출산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며 “그리스는 출산율 하락 추세를 뒤집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리스 정부는 최근 몇 년 동안 출산수당, 유아용품 세제 혜택, 민간 출산수당 확대 등 갖가지 대책을 내놨지만 저출산 극복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소피아 자하라키 그리스 사회통합·가정부 장관은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누구라도 저출산 추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했다. 속도를 늦출 수는 있어도 방향을 돌리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안나 마티시아크 폴란드 바르샤바대 부교수(노동시장 및 가족역학)도 “출산율을 높이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렵다”고 말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