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천리포수목원에서의 한나절은 황홀했습니다. 세상에서 목련의 종류가 가장 많은 수목원에서 눈이 시리도록 목련을 봤으니까요. 컵케이크처럼 생긴 목련을 비롯해 꽃잎이 마흔 장이나 되는 별목련까지…. 4월의 탄생석인 다이아몬드보다 목련이 더 아름다운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천리포수목원 후박나무집 앞의 ‘스타워스’ 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달 21일까지 열리는 천리포수목원의 ‘사르르 목련 축제’에 간 것은 이 수목원을 설립한 고 민병갈 원장(1921~2002·미국 이름은 칼 페리스 밀러)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난해 9월 썼던 ‘고 민병갈 천리포수목원장님에게 보내는 계절 편지[김선미의 시크릿가든]’ 기사(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30910/121101598/1 )의 맨 마지막은 이랬습니다. ‘내년 봄 목련이 가득 필 무렵에도 가겠습니다. 각별히 아끼셨다는 ‘라즈베리 펀’ 목련, 딸기에 크림을 얹은 색 같다며 ‘스트로베리 앤드 크림’이라고 이름 붙이신 목련도 보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천리포는 계절마다 가봐야 한다고 말하나 봅니다. 천리포수목원을 아끼고 사랑하는 팬들이 많습니다, 원장님.’
민병갈 원장이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지었던 천리포수목원 목련집 앞의 ‘조 맥다니엘’ 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민병갈 원장이 사랑한 목련
예. 이번에 가서 라즈베리 펀 목련도, 스트로베리 앤드 크림 목련도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아왔습니다. 라즈베리 펀은 천리포수목원 밀러가든의 민병갈 원장 동상 옆에 별 모양의 연분홍 꽃을 풍성하게 피우고 있었습니다. 1987년 민 원장이 큰별목련 ‘레오나르드 메셀’에서 타가 수분된 종자를 파종해 선발(선택)한 재배종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생전에 이 목련을 남달리 좋아했다죠. 그는 천리포수목원 후박나무집에 살면서 집 앞에 라즈베리 펀을 심고 매일 아침 “굿모닝, 맘(Mom)”이라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천리포수목원 밀러가든 내 민병갈 원장 동상과 그 옆의 ‘라즈베리 펀’ 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동상 오른쪽 앞 태산목 ‘리틀 젬’ 아래에는 흰 국화가 놓여 있었습니다. 2002년 4월 8일 타계한 민 원장의 22주기 추모식이 최근 열렸기 때문입니다. 50세에 척박한 천리포에 나무를 심기 시작해 81세에 세상을 뜨기 전까지 민 원장은 ‘나무가 주인인 수목원’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나 죽으면 묘 쓰지 마세요. 그럴 땅에 나무 한 그루 더 심으세요”라고 했다는데요. 남겨진 사람들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민 원장의 묘를 만들었다가 2012년 10주기 때에서야 리틀 젬 아래에 수목장을 했습니다. 민 원장이 아꼈던 라즈베리 펀도 그 무렵 밀러가든으로 옮겨 심어진 것이에요. 히야신스 향과 연분홍빛 라즈베리 펀이 어우러지는 공감각의 정원에서 어머니의 사랑과 아들의 효심을 느껴봅니다.
민병갈 원장이 ‘어머니 나무’로 불렀던 ‘라즈베리 펀’ 목련. 천리포수목원 제공
민병갈 원장의 수목장이 진행된 태산목 ‘리틀 젬’. 천리포수목원 제공
스트로베리 앤드 크림은 밀러가든 벚나무집 옆에서 만났습니다. 이름처럼 꽃이 딸기우유 빛입니다. 하늘거리는 모습이 어딘가 동양적인데다 향기가 무척 달콤합니다. 높이 5~8m 정도로 자라는 나무에서 포도주잔 모양의 꽃이 20cm 크기로 핍니다.
딸기우유 빛의 스트로베리 앤드 크림 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불칸’, ‘갤럭시’…926종 목련의 향연
천리포수목원이 ‘세계적’ 수목원으로 불리는 건 목련, 호랑가시나무, 동백 등을 집중적으로 육성한 결과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이 현재 보유한 목련은 무려 926종. 이번 목련 축제에서는 그 목련들이 즐비한 목련정원과 산정목련원을 해설과 함께 둘러 볼 수 있습니다. 특히 1시간 정도 동산을 오르며 보는 산정목련원은 올해 처음 개방됐습니다.
각종 목련이 어우러진 목련정원 전경.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끄는 목련은 ‘불칸’입니다. 화산을 뜻하는 ‘볼케이노’(volcano)와 불의 신 ‘불카누스’(Vulcanus) 등에서 유래한 이름답게 크고 강렬한 붉은색 꽃을 자랑합니다. 꽃 속 깊은 곳까지 온통 붉은색이라 정말로 화산 같아요.
강렬한 색상이 시선을 사로잡는 ‘불칸’ 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궁극의 아름다움은 우주와 통하는 걸까요. 목련정원의 ‘갤럭시’와 민 원장이 살았던 후박나무집 앞 ‘스타워스’는 큰 키와 밝은 분홍빛의 꽃잎이 우람한 위용을 자랑합니다. ‘선듀(Sundew)’는 탐스러운 꽃이 무거워 나뭇가지가 내려앉은 듯한 곡선의 수형이 그림 같습니다. 목련이 이슬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 같기도 해요. 다른 색상 목련보다 조금 늦게 꽃이 피는 노란색 ‘엘리자베스’와 ‘옐로 랜턴’도 이제 봉오리들을 열었습니다.
목련정원에서 우람한 위용과 화려함을 자랑하는 ‘갤럭시’ 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천리포수목원 후박나무집 앞의 ‘선듀’ 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천리포수목원 산정목련원의 ‘옐로 랜턴’ 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개인적으로는 살랑살랑한 별목련들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겹벚꽃을 닮은 별목련 ‘크리산세무미플로라’는 상냥하고 발랄한 요정이었어요. 별목련은 높이 4~6m로 자라며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귀여운 여인 같은 목련입니다. ‘투 스톤’도 잊을 수 없어요. 우리 토종인 고부시 목련을 원종으로 해 선발한 목련인데요. 꽃잎이 15장 정도 달리면서도 우리네 함박꽃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은근한 매력이 있더라고요.
연분홍 꽃잎이 수십장 겹쳐 사랑스러운 ‘크리산세무미플로라’ 별목련. 천리포수목원 제공
은근하고 고전적인 매력을 풍기는 ‘투 스톤’ 별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순간적이면서도 영원한 아름다움
빨간 동백, 앵초, 꽃댕강나무, 서향, 분꽃나무, 붓순나무 등이 제각기 색과 향을 뽐내는 봄의 정원에서 목련의 아름다움은 독보적이었습니다. 특히 목련과 수선화는 아주 잘 어울리는 식재 조합이었어요. 해외 여느 정원보다 천리포수목원이 아름다웠습니다.
목련과 수선화의 조합이 그림같은 천리포수목원.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저는 목련을 보면서 이탈리아의 ‘국민 화가’ 조르조 모란디(1890~1964)의 정물을 떠올렸습니다. ‘아니, 엄격하고 정교한 구성미를 가진 모란디의 길쭉한 화병들과 목련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모란디가 정물을 그린 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덧없는 운명보다 영원불변의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이에요. 그도 꽃 그림을 그리긴 했습니다만, 곧 시드는 생화 대신 말린 꽃을 그렸죠. 작가가 영원을 추구한 방식이었어요.
조르조 모란디의 화병을 떠올리게 한 천리포수목원의 ‘선라이즈’ 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개인적으로는 목련에서 모란디의 정물처럼 구도(求道)적이고 강인하지만 한편으로는 처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련은 1억4000만 년 전인 백악기 화석에서도 발견될 만큼 오래된 식물이에요. 그 오래된 ‘목련의 청춘’은 왜 이리 짧아야 하나요. 생동하는 젊음을 어떻게든 붙들고 싶은 건 인간의 본성일까요.
튤립을 닮은 회화적 느낌의 ‘새티스팩션’ 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천리포수목원의 목련을 감상한 후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목련은 청순한 봉오리로부터 꽃을 피운 후 곧 퇴장하지요.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애달파서 프랑스 미학자 장 뤽 낭시(84)의 강연집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을 꺼내 읽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움이 일시적인 것은 아닌가’라고 묻는 학생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아름다운 질문입니다. 비 온 후 하늘의 무지개를 상상해 보세요. 곧바로 사라져 버리지요. 하지만 아름다움은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영원합니다. 화가는 그림으로 그 아름다움을 화폭에 잡아두고 싶어 하지만 화폭은 훼손될 수 있어 영원하지 않아요. 영원함은 오랜 시간 지속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간에서 벗어난 것을 일컫습니다.”
천리포수목원에 있는 우리나라 목련.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천리포수목원에는 ‘비온디 목련’도 있습니다. 봄비 내린 뒤 피면서 수목원에 봄을 가장 먼저 알리기 때문에 ‘비온뒤 목련’으로도 불립니다. 오랜 기다림 후에 만난 천리포수목원의 목련은 아름다웠습니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안도합니다. 그래요.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거예요. 목련이야말로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아름다움인가 봅니다.
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