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7일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법안이 표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몸싸움으로 점거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무법국가의 표본으로 삼기엔 북한만 한 곳도 없다.
과거 탈북했다가 북송됐던 개인적 경험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당시 난 교화소에 끌려갈지,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갈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조사관들은 “너는 김일성대 졸업생이라 훨씬 크게 처벌받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 한국에서 “넌 서울대 졸업생이라 더 큰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고 할 게 뻔하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중국에서도 베이징대를 나왔기 때문에 같은 죄가 더 중하게 처벌된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북한에선 경력에 따라 처벌이 달라진다는 말이 너무 당연하게 들린다.
북한에선 김씨 일가의 말이 곧 법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당시 탈북했다 북송된 사람들만 봐도 김정일이 “관대히 봐주라”고 하면 우르르 풀려났고, 반대면 우르르 교화소로 끌려갔다. 김정일이 “사회 기강이 해이해졌으니 총소리를 울리라”고 하면 크지 않은 죄로도 공개 총살됐다.
유훈통치란 개념은 설명조차 어렵다. ‘김일성저작선집’만 봐도 성경만큼 두꺼운 책이 100권을 넘는다. 김정일, 김정은의 말을 적은 책까지 모아놓으면 수십 트럭은 족히 된다. 여기선 이 말을 하고, 저기선 저 말을 했지만 상관없다. 처벌할 땐 필요한 구절만 인용해 “수령님의 말씀을 거역했다”고 죄를 만들면 된다. 그렇다고 유훈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얼마 전 김정은이 통일이란 단어를 삭제하라며 각종 기념물을 폭파해도 김정은이 유훈을 위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법국가에선 법관이 그다지 권세 있는 직업이 아니다. 북한에선 기업들 털어 뇌물을 먹고 살 수 있는 검사 정도만 좀 위세가 있지만, 그들도 당 간부 앞에선 머리를 숙여야 한다. 소신 판결이 불가능한 곳에서 판사는 허수아비일 뿐이고, 변호사는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북한에서 살다 한국에 오니 무슨 법이 그리 많은지 놀랄 때가 많다. 수령의 기분에 따라 고무줄 잣대로 처벌받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만큼 법치국가가 훨씬 더 좋은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법이 힘이 있으니 법조인의 위세도 좋다. 판검사, 변호사가 되는 게 인생의 성공 잣대다. 그런데 한국에 왔던 20여 년 전과 비교해 보면 점점 더 법이 득세한다. 뭔 일만 터지면 법을 만들겠다고 떠들고, 정치적 문제도 법원 판결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다가 판사가 총리가 되더니, 검사가 대통령까지 됐다. 며칠 전까진 양당 수뇌도 법조인 출신이었다. 이런 ‘법조인 득세 시대’가 일시적인 것 같지는 않다. 법이 많아질수록 법조인의 힘이 빠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의 전문성은 점점 떨어지는 것 같은데 오히려 법은 그에 비례해 늘어나니 문제다. 게다가 법안을 많이 만들면 우수 의원이라고 표창까지 한다. 반세기 전의 낡은 법들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속도로 새 법들이 나오다간 법의 무게에 깔려 질식할 판이다. 민주당은 현 정권을 ‘검사 독재정권’이라고 규탄하지만, 법을 이리 많이 쏟아내면서 검사의 힘을 빼겠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22대 국회가 새로 구성됐다. 법부터 만들겠다고 벼르던 사람들도 대거 당선됐으니 이번 국회는 초반부터 법이 쏟아질 것이다. 이제부턴 법을 만들었다고 상을 주지 말고, 과거 법을 다듬고 정리하고 줄이는 의원에게 상을 주면 어떨까. 같은 민족인데 한쪽은 법이 없어 죽고, 한쪽은 법에 깔려 죽는 것을 보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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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