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이 대표작 ‘꽃’에 쓴 것처럼 야구에서도 구심(球審)이 스트라이크라고 불러줘야만 스트라이크는 스트라이크가 된다. 실제로 한국야구위원회(KBO) 공식 규칙은 “심판원이 ‘스트라이크’라고 선언한 것”을 스트라이크라고 정의한다. 어떤 공이 스트라이크인지 아닌지 판단할 권한은 명백히 인간에게 있었다.
앞 문장을 과거형으로 쓴 건 KBO가 흔히 ‘로봇 심판’이라고 부르는 볼·스트라이크 자동 판정 시스템(ABS)을 올해부터 도입했기 때문이다. KBO는 ABS 운영 세부 규정을 발표하면서 ‘인간 심판은 ABS 결과에 개입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로봇 심판이 스트라이크 여부를 판단해 알려주면 인간 심판은 이어폰을 통해 전달받아 선언하는 ‘거수기’ 역할만 잘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올해는 달랐다. 강인권 NC 감독이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왔다. KBO가 제공한 태블릿PC 화면에 ABS가 이 공을 스트라이크라고 판단했다고 나와 있었던 것. 문제는 기술적인 이유로 이재학이 공을 3개 더 던진 뒤에야 이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이 경기 심판 4명은 회의를 거친 뒤 “어필 시효가 지났다”며 항의를 기각했다. 경기가 이미 진행된 만큼 이를 무를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회의 과정에서 심판 한 명이 “(ABS가) 볼로 인식했다고 하세요. 우리가 빠져나갈 (방법은) 그거밖에 없는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TV 중계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야구 규칙은 인간 심판을 ‘그라운드 안에서 야구의 유일한 대표자’라고 치켜세운다. 그러나 로봇 심판 앞에서 도합 경력 98년인 인간 심판 4명은 거짓말로 상황을 덮기 급급했다. 사실 판정 정확도 99.9%를 자랑하는 로봇 심판 앞에서 인간 심판은 작아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다른 분야 사정은 얼마나 다를까. 인공지능(AI)은 생산성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창의성에서도 인간 지능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히트곡 제조기로 통했던 김형석 작곡가는 한 공모전에서 자신이 1위로 뽑은 노래 작곡가가 AI라는 사실을 알고 허탈해하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기도 했다.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