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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서영아]아시아엔 왜 ‘죽음의 자기결정권’ 허용국이 없을까

입력 | 2024-04-22 23:45:00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내 삶의 마감을 내가 정하겠다’는 생각은 섭리를 거스르는 오만일까, 혹은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기본권일까.

지난해 12월 조력 존엄사 허용을 기대하며 헌법소원에 나선 이명식 씨는 5년간 매일 찾아오는 통증에 고통받고 있다. 통증은 마약성 약물로도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을 1∼2%나마 줄이려면 심각한 부작용을 각오하고 약물을 포기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 판결을 기다리는 게 요즘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다.

이런 그가 일본에서 들려온 뉴스에 분개해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2019년 루게릭병을 앓는 여성(당시 51세)을 안락사시킨 의사 오쿠보(46)에게 징역 18년 형이 내려졌다는 소식이다. 그는 ‘세상에 무책임한 사람이 많다’며 분개했다. 딸을 잃은 83세 아버지가 “형이 무겁거나 가벼워도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제2, 제3의 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한 발언에 대해서도 “고통에 힘들어하는 딸에게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마냥 살아있기를 바라느냐”고 성토했다. 또 “환자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게 해달라고 돈을 주고 부탁해야 하는 상황에 국가는 뭘 해줬느냐”며 “책임을 못 지면 대책을 세워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인 63%가 조력존엄사 찬성


일본 영화 ‘플랜 75’는 정부에 의해 안락사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세상을 그렸는데 많은 이의 우려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배경에는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청년이 받는다”는 각박한 인식이 깔렸다. 이런 제도가 광범위하게 시행된다면 어떤 고령자가 사회적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3월 10일자로 이명식 씨를 다룬 기사가 나간 뒤 리서치앤리서치 노규형 대표가 ‘연명의료결정법 및 조력존엄사법’에 관한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보내왔다. 기사를 보고 일부러 기획했다는 조사는 1000명을 대상으로 성별 연령별 지역별 종교별로 표본을 맞췄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명의료결정법에 대해 응답자의 65.3%가 찬성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사람은 12.7%에 불과했으나 62%가 앞으로 쓸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조력존엄사법에 대해서는 62.7%가 찬성, 12.1%가 반대했다. 주목할 점은 응답자의 연령대가 높을수록 찬성률이 높았다는 것이다. 종교 여부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내 삶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


존엄사 혹은 안락사 관련 논의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나는 안락사로 죽고 싶다’고 공표했던 일본 작가 하시다 스가코를 인터뷰했던 2018년 초만 해도 ‘이상한 기자’로 보일까 위축되는 마음이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5, 6년 한국 사회에서도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존엄사에 찬성하는 여론이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고령자가 늘면서 일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죽음을 부쩍 가깝게 체험할 수 있게 된 탓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의 자기 결정권을 허용하는 국가 대부분이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 선진국이고 아시아권은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생과 사에 대한 관점, 개인의 권리에 대한 시각이 동서양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집단주의가 강한 문화권일수록 조력존엄사의 길을 열어놓는다면 쏠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하는 듯하다.

이 대목에서 던져보는 질문. 한국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중 어느 쪽이 강한 사회일까. 조력안락사가 허용된다면 절제된 사용이 가능할까. 최근 보건복지부는 연명의료 중단 시기를 말기 환자에서 암이나 중증 진단을 받은 단계로 앞당기는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고령자 문제를 다뤄 온 입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건 한국 사회가 무척 빨리 변하고, 쏠림도 심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대 흐름은 ‘개인 존중’의 방향으로 진보해갈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진지한 사회적 논의와 준비가 필요한 이유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