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도가 타인에게 정확히 전달될 거라 과신 이해 못하는 상대 탓하는 건 현실인식 오류 내 안의 자기중심성 직시하고 극복 노력해야
이은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샐리가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상자 안에 인형을 두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앤이 방에 들어와 그 인형을 상자에서 꺼내 다른 곳으로 옮겼다. 얼마 뒤 샐리가 방에 돌아와 자기가 두고 간 인형을 찾는다. 자, 샐리는 어디에서 인형을 찾을까?
많은 분들이 어렵지 않게 짐작하셨듯, 정답은 “상자 안”이다. 모든 과정을 본 우리와 달리, 샐리는 앤이 인형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어쩌다 알게 된 사실을 샐리는 알지 못하고, 따라서 인형의 위치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본인이 아닌, 상대방의 관점에서 그 사람의 사고를 유추하는 능력은 대략 4∼5세 정도면 발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경우에 비해 비대면 소통, 특히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처럼,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나 음성 등의 단서가 사라진 문자 기반 소통의 경우 상대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오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제한된 채널을 통해서도 본인이 의도한 바를 다른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과신한다는 점이다.
후속 연구에서는 사람들에게 이메일로 농담을 전달하게 한 뒤, 메일 수신자가 그 농담을 얼마나 재미있다고 생각할지 추정하게 했다. 이때 일부 참여자는 이메일을 보내기 전, 코미디 프로그램인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서 해당 유머를 시연하는 것을 시청했는데, 이들은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지 않고 농담을 전송한 사람들에 비해, 메일을 받은 사람들이 해당 농담을 더 재미있어 할 거라 응답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주관적 경험에 따라 다른 사람의 반응을 예측한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의 원인으로 너나없이 불통을 꼽는다. 다양한 진단이 있겠으나, 우리 안의 자기중심성을 직시하고 이를 벗어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아닌가 싶다.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달라고 기대하는 것이 무모한 바람이라면, 실은 개떡같이 말하면서 본인이 찰떡같이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나아가 본인은 찰떡같이 말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개떡같이 알아들어서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현실인식과 다름없다.
우리는 자신이 보는 세상이 객관적인 현실이라고 믿는다. 의견 차이가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이익, 정치 성향, 혹은 제한된 개인적 경험 등에 따라 편향되어 있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편향되어 있다고 판단하면 양쪽 입장을 같이 논의하거나 본인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거나 관련 사실을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등의 ‘협조적’ 수단은 무용하다. 따라서 상대의 의견 표현을 막거나 다수 의견을 따르도록 밀어붙이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등의 ‘경쟁적’ 수단을 선호하게 되고 이는 갈등의 증폭을 가져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다시 샐리와 앤의 얘기로 돌아가 보면 샐리는 어쩌면 앤이 옮겨 둔 자리에서 인형을 찾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 앤이 샐리를 만나 인형을 어디로 옮겼는지 말해줬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우리가 앤이 옮긴 줄도 모르고 원래 둔 자리에서만 인형을 찾고 있는 샐리는 아닌가?
이은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