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 시기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옛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 잇달아 수교하는 ‘북방정책’에 깊이 관여한 노재봉 전 국무총리(사진)가 23일 오후 혈액암 투병 중 별세했다. 향년 88세.
경남 마산 출신인 노 전 총리는 미국에서 알렉시 드 토크빌의 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해 1967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자문역을 맡아 대통령 직선제를 이끈 ‘6·29선언’을 작성하는 데 관여했고, 이 인연으로 1988년 청와대 외교담당특별보좌관, 1990년 대통령비서실장을 거치면서 한-소련 첫 정상회담을 비밀리에 조율하는 등 북방외교를 추진했다. 고인은 2021년 10월 노 전 대통령의 국가장에서 추도사를 읽으면서 “통치의 도덕성은 절제에 있다는 것을 ‘각하’의 통치에서 절실히 깨닫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노 전 총리는 정계 은퇴 후 제자 그룹과 시민사회 및 문화예술 분야 활동가들과 함께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2013년 ‘목요공부방’부터 ‘한국자유회의’까지 지식사회 플랫폼을 운영해 자유와 체제 수호의 가치를 강조해 왔다. 노 전 총리의 수제자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독시탐안(讀時探案·현실을 읽어 해결 대안을 찾고 제시해야 한다)’의 자세를 강조하셨다”며 “국민들이 공기처럼 느끼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중요성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조성환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통령 직선제 이후 대한민국 헌정 시스템의 기틀을 마련하셨다”고 평가했다. 서명구 전 대통령비서관은 “병상에서도 ‘한국 사회가 전체주의 사회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변질이 심화되고 있다’고 경종을 울리셨다”고 회고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지연월 씨(88)와 딸 모라 씨(62), 아들 진 씨(57)가 있다. 빈소는 25일 서울성모병원에 차려지며 발인은 27일 오전이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