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의 이색 교육 실험…올레길 트레킹 수업 교수 학생 ‘놀멍’ ‘쉬멍’ ‘걸멍’ 통한 소통에 초점 학생들 “맞춤형 조언 들을 수 있다”며 크게 만족
제주대가 이번 학기에 새로 도입한 ‘제주 올레길과 자아성찰’ 수업은 김일환 총장(오른쪽)과 학생들이 올레길을 같이 걸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게 핵심이다. 김 총장과 학생들이 제주 바다를 배경 삼아 만세를 부르고 있다. 제주대 제공.
보통 대학에 가서 총장 얼굴 볼 일이 4년 동안 몇 번이나 있을까. 기껏 입학식이나 졸업식, 축제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총장을 매 수업 때마다 만나 길을 함께 걷는 대학수업이 있다. 총장은 수강생들의 이름을 모두 안다. 어디에 살고, 어떻게 중고교 시절을 보냈고, 현재 고민이 무엇인지 등도 줄줄이 꿴다. 수업에는 교수들과 외부인들도 참여해 학생들의 멘토가 되어 준다. 수강생들의 반응도 좋다. 대학이 아직 낯선 24학번 새내기들도 첫수업만에 총장과 교수, 다른 과 동기, 선배들과 친해졌다. “어른들과 말을 섞고 땀 흘리며 소통하는 자체만으로 기분 좋다. 무작정 듣고 배우는 게 많다. 수강하길 잘했다”며 만족해한다. 진로 고민이 컸던 3~4학년들은 “총장, 교수, 멘토들에게서 맞춤 조언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제주대 총장-학생 함께 올레길 걷고 눈높이 대화 수업 큰 호응
총장과 학교 주요 보직 교수들이 수업을 같이 하며, 이 대학을 졸업한 분야별 선배들도 멘토로 참여한다. 시험이 없고, 평가도 없다. 내가 어떠한 존재이고, 어떤 꿈을 가져야 하는지를 깨닫는게 목적이다. 학생들은 수업 후기를 자유롭게 써내기만 하면 된다.
수업은 김일환 총장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치열한 입시 경쟁를 겪으면서 지칠대로 지친 학생들에게 확 트인 제주 자연을 접하면서 자기의 잠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우리로 사는 가치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연히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잖았지만 김 총장은 밀어붙였다. “제주대에는 섬 밖 외지인 학생들도 많이 옵니다. 중·고교 때 부모님의 관리를 받으며 혼자 공부한 친구들입니다. 이들이 집하고 먼 이곳에까지 와서 혼자 지내며 다시 고립되더라고요. 고립되는 건 요즘 대학생들 모두의 문제입니다. 막연하게 대학을 와서 누구를, 어떻게 만나야하는지 혼란스러워합니다. 이런 학생들에게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김 총장과 제주대 보직 교수, 선배 멘토, 학생들이 5일 제주 올레길 9코스에서 진행된 ‘제주 올레길과 자아성찰’ 수업에 앞서 출발 지점인 대평 포구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제주대 제공.
학교에서 출발지까지 버스 두 대가 동원됐다. 김 총장은 학생들이 탄 버스에 올랐다. 한 마디라도 학생들과 대화를 더 하기 위해서다. 생명공학부 학생에게 “오늘 내 짝꿍이냐”며 반갑게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수업을 통해 학생뿐만 아니라 김 총장도 얻는 게 많았다. “대학 상담실에서 학생들을 만나면 솔직한 얘기를 안 하고 숨어버립니다. 그런데 밖에서 만나 ‘놀멍, 쉬멍, 걸멍(놀면서, 쉬면서, 걸으면서의 제주도 방언)’하면서 아무 말이나 하자고 하니 허심탄회한 대화가 되더군요. 역시 진로와 대인 관계 고민이 컸습니다.”
김 총장(왼쪽)이 트레킹을 하면서 학생들과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제주대 제공.
새내기 이효웅 학생(물리학과 1)은 트래킹 중간 점심식사를 마치자마자 “저의 진로를 찾았다”며 “홍주연 교수(미래교육과)님처럼 사람들과 재미있게 어울려 사는 교수가 되겠다”라고 외쳐 큰 박수를 받았다.
일흔이 넘은 나이로 관광융복합과의 새내기로 입학한 김순오 씨는 “올레길을 걸으면서 병이 나았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며 “다음 수업과 그 다음 수업에 참여하는 게 나의 꿈”이라고 말해 참석자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변방의 작은 교육 혁명이 큰 울림이 됐으면…”
교외 멘토로 참여한 이들도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행을 인솔한 (사)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은 “길에서 길을 찾으라”는 말로 학생들에게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날 수업에는 주 제주 일본국총영사관 다케다 가츠토시 총영사와 주 제주 중국총영사관 왕루신 총영사도 참여했다. 이들은 수업 방식에 호평을 쏟아내며 유창한 한국어로 학생들과 대화하는 데 기꺼이 동참했다.
김 총장은 앞으로 한-중-일 대학생들이 올레길을 같이 걸으면서 소통하는 ‘런케이션’(배움의 Learn과 휴가의 Vacation을 합친 말)도 계획하고 있다. 또 학생들이 제주도 자연을 보고 걸으면서 솔직하게 털어 놓은 현실적 고민과 미래, 꿈 등에 관한 후기 등을 묶어 책으로 내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교육부의 ‘글로컬 30 대학’ 지정사업에 재도전하는 제주대는 대학 내 전공벽을 과감히 허물고 학생의 학습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을 변화의 최우선 기조로 삼았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작업이 이번 수업이다.
김 총장은 이런 노력들이 한국 교육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신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우리 학생들이 피말리는 입시 경쟁 하에서 자기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없이 얼마나 마음 고생을 하고 힘든 시간을 버텼는지,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말 필요한 공부를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 볼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 교육이 먼저 학생들에게 인성과 자신감, 목표 의식을 분명하게 심어주는 방향으로 혁신해야 합니다. 우리 학교의 노력이, 제주도의 작은 ‘남풍’이 한국 교육에 큰 울림이 됐으면 합니다.”
제주=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