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함과 놀라움 사이… 노 팬츠 룩
작년 ‘미우미우’가 선보인 후 패션계에 퍼져
남성 모델이 스타킹만 신고 런웨이 나서기도
사람들이 속옷만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실제 상황이다. 온갖 패션 실험이 난무하던 지난해 난도 최고 레벨의 이 기상천외한 트렌드가 찾아왔다. 이름하여 노 팬츠 룩. 말 그대로 하의를 입지 않고 속옷을 그대로 노출하는 하의 실종 패션이 패션계를 경악, 아니 장악하고 있다.
미우미우의 2024 봄여름 컬렉션에도 스트라이프 폴로셔츠에 삼각팬티를 입은 모델들이 대거 등장했다. 미우미우 제공
유행의 신호탄을 알린 건 미우미우. 지난 2023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난데없이 속옷 바람의 모델들이 줄지어 등장하며 관객의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포근한 니트스웨터와 카디건에 브리프를 한 벌로 천연덕스럽게 연출하는 식이었다. 파격적인 헤어와 스타일로 젠지(Z세대) 사이에서 대체불가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미우미우의 뮤즈, 엠마 코린이 베니스영화제에서 선보인 노 팬츠 룩은 쉽게 도전하기 이 어려운 트렌드를 현실로 이끌었다. 그의 용기에 이어 켄달 제너, 벨라 하디드, 줄리아 폭스 등이 남성의 트렁크나 삼각팬티 바람으로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며 트렌드 전파에 나섰다.
사실 노 팬츠 룩이 처음 목격된 건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먼저 1990년과 2000년대 초반 남성 트렁크의 편안함을 예찬하는 여자들의 고백이 있었다. 통기성 좋고 편안한 트렁크가 왜 여성용은 없는지에 대한 불만도 나왔다.
최근 들어 성별 구분 없는 젠더리스 패션이 유행을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면서 여성복이 여성과 남성 속옷까지 손을 뻗치게 됐다. 어쩌면 노 팬츠 룩이라는 이 요상한 패션은 옷은 갖춰 입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파괴하고자 하는 시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기류가 더욱 강해졌다. 이제 더는 런웨이에서 속옷 바람의 모델을 목격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여전히 트렌드의 선봉에 선 미우미우는 스트라이프 패턴의 폴로셔츠와 점퍼에 미우미우 자수 로고가 새겨진 브리프로 한 단계 더 진화된 프레피 스타일의 노 팬츠 룩을 선보였다. 빅토리아 베컴과 신예 매기 마릴린 역시 정통 프레피룩에 하의로 브리프를 택하며 결을 함께했다.
발렌티노는 2024 봄여름 컬렉션에서 미니멀한 슈트 차림의 노 팬츠 룩을 선보여 시선을 사로잡았다. 발렌티노 제공
말쑥한 정장 차림에도 노 팬츠가 적용되는 진귀한 광경이 연출됐다. 발렌티노는 간결한 화이트 셔츠와 재킷에 브리프를 매치해 적나라하기보단 되레 쿨한 분위기를 끼쳤다. 미니멀한 슈트 스타일의 노 팬츠 룩을 선보인 자크뮈스도 마찬가지. 종아리까지 당겨 신은 양말과 로퍼로 노출에 대한 부담을 더는 영민함을 보였다.
돌체앤가바나는 2024 봄여름 컬렉션에서 하늘하늘한 시스루 소재와 러플 장식의 톱에 브리프를 매치해 새로운 관능미를 제안했다. 돌체앤가바나 제공
이외에 구찌와 사카이, 스키아파렐리 등의 브랜드도 포멀한 스타일에 브리프를 매치하는 식으로 트렌드 행렬에 동참했다. 하늘하늘한 시폰과 러플 장식 톱에 브리프를 매치해 새로운 관능미를 정의한 에어리어와 돌체 앤 가바나 등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성복에서도 노 팬츠 룩의 기류가 목격된 가운데 JW앤더슨은 남성의 트렁크와 브리프를 노출하는 대담함으로 트렌드에 앞장섰다. JW앤더슨 제공
이러한 트렌드가 비단 여성복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올해는 남성복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JW 앤더슨 쇼의 남자 모델들은 니트스웨터에 하의 대신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시스루 스타킹을 신은 채 런웨이를 누볐다. 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루도빅 드 생 세르넹은 순백의 러닝셔츠에 사각 트렁크와 재킷을 매치하는 과감함으로, 패턴의 귀재 마린 세르는 복서 트렁크에 하우스만의 차별화된 기법이 돋보이는 프린팅 재킷으로 예술성을 결합한 노 팬츠 룩으로 시선을 모았다.
패션계가 제아무리 노 팬츠 룩에 열을 올려도 “노출이 부담스럽다” “누가 볼까 민망하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와 같이 대중의 시선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사실 설정부터가 비현실적이며 패션의 규칙과도 잘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노 팬츠 룩 트렌드는 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미 첫걸음을 뗐다. 열린 마음으로 이 흥미진진한 트렌드를 지켜볼 일이다.
안미은 패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