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논설위원
‘눈에 띄는 모델이 하나도 없다.’ 지난주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발표한 ‘인공지능(AI) 인덱스 보고서’는 한국엔 굴욕적이었다. 보고서는 지난해 한국이 생성형 AI를 만드는 기반인 ‘파운데이션 모델’을 단 하나도 개발하지 못했다고 썼다. 주목할 만한 머신러닝 모델 중에도 한국의 이름은 없었다. 아랍에미리트(UAE)나 이집트보다도 못한 결과다. “미국, 중국과 더불어 AI 분야 3대 강국(G3)으로 도약하겠다”는 정부의 야심 찬 선언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독자 모델 갖고도 해외서 무시당한 韓
사실 보고서 내용엔 허점이 많았다. 지난해 네이버 ‘하이퍼클로바X’, LG ‘엑사원 2.0’, 삼성전자 ‘가우스’ 등 다양한 국내 모델이 개발됐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특정 데이터 소스 두 곳에만 의존해 자료를 취합했고, 특히 비영어권의 성과를 많이 빼먹었다. 보고서가 나온 뒤 정부는 해명 자료를 내고 스탠퍼드대에 수정을 요청했다. 업계도 오류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민간 연구기관의 조사 부실에 따른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찜찜하다. 만약 미국의 성과가 턱없이 적게 집계됐다면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다시 자료를 뒤적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 AI 기술 생태계가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는 결과에도 미국 연구진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해외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AI 기술력이 딱 그 정도 수준이란 의미다.
보고서에서 우리가 정작 뼈아프게 느껴야 할 대목은 따로 있다. 1만 명당 AI 인재 이동 지표는 ―0.3으로 순유출을 보였다. 2020년 기준 한국의 AI 인재가 2500여 명으로 전 세계의 0.5%에 불과한 상황에서 인재가 빠져나가기까지 한다는 점엔 위기를 느껴야 한다. AI 민간 투자는 13억9000만 달러로 9위에 그쳤는데 미국의 50분의 1, 중국의 5분의 1 규모에 불과하다. 자본과 인재 없이 제대로 된 경쟁이 될 리가 없다.
민관 합동 실행전략으로 판 뒤집어야
다행히 AI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에서 국가별로 기술 격차는 그리 크지 않다. 중요한 것은 AI를 다양한 산업과 서비스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있다. 최근 챗GPT의 인기가 주춤한 것도 신기한 건 알겠는데 그걸로 뭘 할 수 있는지 막연하기 때문이다. AI를 활용한 다양한 서비스와 시장을 개발하고 초기 수요를 창출하는 전략, 글로벌 빅테크가 장악하지 못한 중동, 동남아시아 등을 공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 대항전’으로 전개되는 AI 경쟁에서 정부와 민간이 한몸으로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동안 정부는 “9조4000억 원을 투자해 AI G3로 도약하겠다” “디지털 인재 100만 명을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숫자를 넘어선 구체적인 비전과 실행전략은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AI의 활용과 규제를 위한 기본 법체계도 갖추지 못했다. 현재 AI 경쟁은 마라톤으로 치면 미국, 중국에 이은 3위 그룹이 두텁게 형성된 상태다. 하기에 따라 3위로 올라설 수도, 10위 밖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 해외에서 국내 AI 성과가 무시되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 굴욕은 실력으로 갚아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