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서울 강남구의 한 호텔 앞에서 박아형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새뮤얼리공대 학장이 자신의 연구 분야인 ‘탄소 포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24일 서울 강남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박아형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새뮤얼리공대 학장은 “기술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시대가 된 만큼 공학도들이 좀 더 전면에 나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문제를 푸는 사람은 결국 문제를 정의하는 사람보다 한참 뒤에 오게 된다. 이제는 이를 바꿀 ‘패러다임 시프트’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박 학장은 한인 여성 최초로 미국 공대 학장에 선임된 인물이다. 간혹 한국계 미국인이 공대 학장에 선임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토종 한국인’이 미국 유수 대학의 공대 학장이 된 것은 처음이다. 박 학장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캐나다에서 브리티시컬럼비아대를 졸업했다. 2007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교수직을 지내다 지난해 9월 UCLA 공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동양 여성’이라는 다소 불리한 조건 속에서 학장에 이르는 데 어려움은 없었을까. 그는 “미국은 ‘미, 미, 미(me, me, me)’ 문화라고 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체화돼 있다. 내가 처음 컬럼비아대 교수로 취임했을 때 선배 교수들이 가장 먼저 한 말이 ‘여기선 손이 빨라야 한다(빠르게 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조용하고 튀지 않아야 한다는 사회 풍토 아래 자라온 한국 여성으로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학생이나 교수를 평가할 때 ‘몇 점’이라는 정량적 평가가 아닌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정성적으로 평가하는 문화 덕분이었다. 지금 당장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꾸준히 적극성이 발현된다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박 학장은 “가령 첫 시험에서 90점, 다음 시험에서 또 90점을 받는 학생보다 70점에서 80점으로 발전한 학생을 더 높게 평가한다. 나는 ‘몇 점짜리’ 학생이라는 일종의 ‘주홍글씨’가 없다”고 했다. 이어 “이공계는 실험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실패란 늘 따라온다. 이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하면 연구에 발전이 없다. 공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특히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여학도들에게 ‘망가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 UCLA에 학문을 뛰어넘는 ‘연결성’ 강조
수많은 UCLA 구성원들을 설득한 박 학장의 비전은 ‘연결성’이었다. 다양한 분야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요즘 시대에는 공대도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과 교류하고 강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철학은 수십년 간 ‘탄소 포집’ 연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탄소 포집은 석탄을 태울 때 나오는 연기, 정유 공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에서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재활용하는 기술이다. 최근 ‘지속가능한 사회’가 글로벌 이슈로 떠오르며 탄소 포집 기술 역시 차세대 미래 기술로 손꼽히고 있다.
박 학장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려면 정말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치도 못한 질문을 제시해줄 수 있기 때문”이라며 한 일화를 소개했다. 그가 한 학회에 참석해 탄소 포집 기술을 발표하는데 한 교수가 “이런 기술이 결국 화력 발전을 지속시키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라는 지적을 했다. 박 학장은 “탄소 포집 기술은 화력 발전으로 인한 환경 오염 리스크를 낮춰주는 기술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됐고, 향후 기업이나 정부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이 기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알게 해준 경험이었다”고 했다.
● 韓 이공계 기피 현상 심각한 우려
반도체 공장 특성상 3교대는 불가피했지만, TSMC는 원격 조정 시스템을 도입해 대만이 낮일 때는 대만 인력들이, 밤일 때는 미국에서 원격 조정으로 공장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박 학장은 “한국 정부나 기업에서도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공계 학생들이 졸업해도 의사 못지 않은 대우를 받는다는 걸 정부 차원에서 보여주고, 기업도 매력적인 직업 환경임을 보여줘야 이공계 인력을 키워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최지원 기자 jw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