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이란, 고대엔 와인 종주국이자 유대인 해방자

입력 | 2024-04-28 11:21:00

[명욱의 술기로운 세계사] 1979년 이란혁명 전까지 중동 최대 와인 생산국… 쉬라즈 품종 유래 설




중동 정세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4월 1일(현지 시간) 이스라엘은 주시리아 이란 영사관을 폭격했고, 이란도 4월 13일 이스라엘을 향해 무인기와 미사일 300대를 발사하며 대응했다. 닷새 후 다시 이스라엘 미사일이 이란을 강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태는 악화됐다. 대리전 양상을 보이던 이란과 이스라엘이 서로 직접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나라 사이가 처음부터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이란 팔레비 왕조(1925~1979) 때만 해도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알고 보면 과거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것도 이란 전신인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기원전 587년 많은 유대인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들은 약 50년간 포로 생활을 했는데, 페르시아 제국 키루스 2세가 신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리면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페르시아 황제가 유대인의 해방자가 된 셈이다. 그는 성경의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고레스왕이다. 관용을 중시한 고레스왕은 유대인의 귀향을 허락했고, 유대인 성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는 비용까지 지원했다.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수시로 “나는 관대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유대인 해방이라는 과거와 무관치 않다.

와인에 진심이던 페르시아

페르시아 신화 속 왕 잠시드(앞)는 와인과 관련된 일화를 갖고 있다. [위키피디아]

페르시아 제국은 와인에도 진심이었다. 와인을 못 마시게 하려고 독이라고 속이기도 했을 정도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페르시아 신화가 있다. 피슈다드 왕조의 네 번째 왕 잠시드와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다. 그 여인은 잠시드와 특별한 관계였지만 왕의 총애를 잃었고, 이에 낙담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왕의 창고에 가서 ‘독’이라고 쓰인 항아리에 담긴 액체를 마셨는데, 마시고 나니 오히려 생기가 도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독의 정체는 와인이었다. 항아리 안에 부패된 포도를 방치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와인으로 발효된 것이다. 여인은 이 경험을 잠시드에게 전했고, 왕은 그를 다시 받아들였다. 더 나아가 페르세폴리스에서 키운 모든 포도를 와인으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조지아에서 최초 와인 유적지가 발견되기 전까지 이란은 최초의 와인 생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이란 자그로스산맥 자락에서 7000여 년 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 와인’의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 가정에서 와인을 만든 흔적으로, 토기 안 내용물은 발효된 포도 과즙, 즉 와인이었다.

실제로 자그로스산맥과 그 주변에는 유명 와인 산지가 있다. 자그로스산맥 내 해발 1486m, 표고 1500m 전후에 위치한 파르스 지방 주도(州都)이자 고원 도시인 시라즈(Shiraz)다. 시라즈는 이란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자 아키메네스 왕조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지로, 당시 수도 페르세폴리스에서 60㎞ 떨어져 있었다.

시라즈와 시라, 쉬라즈

이란에는 유명 포도 품종 시라, 쉬라즈와 유사한 이름을 가진 지역 시라즈가 있다. [제라르 베르트랑 제공]

시라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3가지 꼽자면 시, 장미, 와인이다. 이 가운데 시인 하페즈가 특히 유명하다. 13세기 이 지역에서 활동한 그는 독일 시인 괴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괴테는 하페즈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서동시집’을 집필했다. 도리어 괴테의 서동시집이 유럽과 아시아권에 소개되면서 하페즈가 알려지기도 했다. 괴테는 시에 관해서는 하페즈에 대적할 자가 없다고 했다. 하페즈는 와인과 관련된 시를 많이 남겼다.

장미는 내 가슴에,
와인은 내 손에, 연인도 내 곁에 있으니
그런 날엔 세상의 군주도
나에게는 한낱 노예일 뿐.
신은 세상을 만든 이래 와인
이외의 선물은 주지 않았다.
와인은 신의 이슬,
어둠을 밝히는 빛, 이성의 집.

시라즈가 유명해진 것은 유명 포도 품종 이름이 이곳 지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어서다. 바로 시라(Syrah)와 쉬라즈(Shiraz)다. 시라는 프랑스 남부 론에서 주로 사용하는 명칭이며, 호주에서는 쉬라즈라고 부른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시라라는 품종명이 이란 지명에서 유래한 것은 아닌 듯하다. 어찌 보면 이란의 천년 고도 시라즈가 무척 유명해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란은 와인과 관련해 멋진 역사를 가졌고, 1979년 이란혁명 전까지만 해도 중동 최대 와인 생산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와인을 생산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주류 생산 및 제조, 유통, 음주를 금지하고 있고 이를 어길 시 태형 80대와 벌금형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2500년 전 유대인 해방을 떠올리며 현 사태를 풀 수는 없을까. 특히 와인이 양국 화합의 매개체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알고 보면 술은 이스라엘, 이란, 나아가 인류 모두에게 귀중하고 소중한 유산이니까 말이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37호에 실렸습니다〉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