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귀족 카스틸리오네 궁정 외교관 활동하며 ‘품격’ 연구 꾸미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 강조 1979년 책 ‘중역의 에티켓’과 연결… 보스에 대한 충성 강조도 비슷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 자료 출처 위키피디아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르네상스 엘리트 처세서 ‘궁정인’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1478∼1529)가 쓴 ‘궁정인’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더불어 르네상스 양대 처세서로 꼽힌다. 카스틸리오네는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여러 궁정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특히 구이도발도 공작을 섬기며 머물렀던 우르비노 궁정이 이 책을 집필하는 데 큰 영감을 주었다. ‘궁정인’은 1507년 3월의 나흘 동안 우르비노 궁정에 모인 귀족 부인, 군인, 외교관, 성직자, 예술가들이 나눈 가상의 대화 형식을 취한다.》
이들은 저녁마다 모여 일종의 ‘언어 게임’을 펼친다. ‘완벽한 궁정인의 모습은 무엇인가’가 게임 주제로 정해지고, 참석자들은 궁정 신하가 갖춰야 할 지적 수준, 도덕적 기준, 완벽한 신하의 자질, 이상적인 궁정 숙녀의 품격, 군주를 모시는 신하의 업무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궁정인’에서 신하, 숙녀 등 궁정인들의 자질에 대해 논했다. 그는 궁정인이 꾸미더라도 꾸미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품격 ‘스프레차투라’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료 출처 위키피디아
이것은 ‘기교를 기교로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진정한 기교’로서, 모든 일이 마치 쉽다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거꾸로, 무엇인가를 할 때 허덕거리면서 힘들어 보이는 모습은 품격이 떨어져 보이게 한다. 카스틸리오네는 아주 냉정하게 ‘치열한 노력 끝에 얻은 능력이라는 점이 드러날 때 모든 품격이 박탈된다’고 선언했다.
‘궁정인’은 출판되자마자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엘리트 교양 계층과 정치인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20세기 말에는 비즈니스 세계에 강하게 어필한다는 사실이 감지되었다. 학자들은 현대의 기업이 마치 르네상스 궁정처럼 기업주를 정점으로 다양한 위계의 사람들이 권력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구성원 사이의 경쟁 또한 궁정인의 시대만큼 치열하다고 파악했다.
기업 문화에서는 카스틸리오네가 강조했던 ‘보여지는’ 모습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기업의 중역에게는 궁정 신하와 마찬가지로 ‘바람직한 이미지’가 중요한 자산으로 취급된다. 20세기 말에 발간된 ‘중역의 에티켓(Executive Etiquette·1979년)’이라는 책에는 “자세, 제스처, 표정은 아주 강력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신체의 언어는 입에서 나오는 말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나온다. 마치 ‘궁정인’의 한 대목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학자는 오늘날 비즈니스 세계가 모방을 빙자한 도둑질이 횡행한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궁정과 유사하다고 꼬집는다. ‘궁정인’에는 모방에 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대목이 나오는데, 최고의 자질을 습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모방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특히 품격을 습득하기 위해 스승을 옮겨가며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과정을 “들판에서 벌들이 꽃을 옮겨 다니며 꿀을 채취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것이 전반적인 산업의 발전을 표방하며 다른 기업의 기술을 훔치는 기업의 행태와 닮았다는 것이다.
궁정인이 펼치는 대화의 향연에는 가면무도회, 마상 창 경기, 사격대회 등 다양한 게임이 등장한다. 이는 마치 ‘그림 속 그림’처럼 ‘게임 속 게임’의 구도를 보여준다. 한 연구는 기업이라는 조직이 게임과 마찬가지로 상호 경쟁과 승리자를 추려낼 뿐만 아니라 워크숍, 수양회, 단체 회식, 전략 세션 등을 이용해 또 다른 게임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처럼 일상적 업무를 벗어난 행사는 중역들에게 “비즈니스 게임에서 자신의 기술을 세련되게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기회”가 된다.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