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한국을 방문한 외국 손님들이 오면 항상 서울 인사동에 들른다. 한국적인 기념품을 살 수도 있고, 전통차와 음식을 맛보기에도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사동에는 내가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한글로 된 간판이다. ‘Starbucks’나 ‘GS25’ 같은 영어로 된 브랜드도 인사동에서만큼은 ‘스타벅스’ ‘지에스25’라고 적힌 한글 간판을 쓴다. 한글 간판에 어떤 서체가 쓰였는지 구경하는 것도 재밌다. 동글동글한 서체, 길쭉한 서체 등 브랜드 이미지와 어울리는 다양한 한글 서체들은 그 자체로 한국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카를로스 고리토 브라질 출신 방송인·사업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이런 식의 설명을 하기 아주 곤란하게 됐다. 영어로 간판을 바꿔 다는 가게가 늘었기 때문이다. 혹은 영어를 아주 크게 써 놓고 한글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써 놓은 경우도 있다. 외국인들을 초청해 ‘자, 이 거리를 한번 보세요!’ 하고 외쳤는데 온통 영어뿐이었을 때의 민망함은 잊기 힘들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리려던 시도가 물거품이 된 것 같아 몹시 상심했다.
한글이 사라지는 건 간판에서뿐만이 아니다. 제품 포장에서도 그랬다. 종종 한국 화장품을 사고 싶다는 외국인을 매장에 데려가면 ‘이게 정말 한국 제품이 맞냐’는 질문을 받는다. 제품명부터 패키지에 한글이 단 한 글자도 들어가 있지 않고 전부 외국어만 가득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제품명과 패키지를 한글로 내세운 브랜드가 외국인들에게 더욱 인기를 끄는 경우도 보았다. 한국인들은 알파벳으로 뒤덮인 제품들을 쓰는데, 정작 외국인들에게는 한글이 쓰인 제품이 ‘한국스럽다’ ‘너무 예쁘다’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외래어에 밀려 사라지는 한국어 단어도 적지 않다. 내가 한국에 처음 왔던 2008년에도 외래어 문제에 대한 지적이 심상찮았는데, 2024년에는 더더욱 심해졌다. ‘합승’은 ‘카풀’이 되었고, ‘포장’은 전부 ‘테이크아웃’으로 바뀌었다. ‘독서실’ 대신 ‘스터디 카페’가 유행처럼 번졌다. 내가 배웠던 한국어 단어들을 거꾸로 외국어로 다시 말해야 하는 상황이 와버렸다.
이제는 외국인들을 만나면 “전부 영어로 쓰여 있으니 한국어를 굳이 배우지 않아도 괜찮더라”라는 말을 듣는 지경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외래어의 도입이 세계시민 의식을 배양하기 위해서, 혹은 국제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잘 안다. 외국인들을 배려하는 거라면 적절한 번역이 적힌 설명을 추가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한국어를 없애고 어색한 외래어를 마구잡이로 가져다 붙이는 건 배려가 아니라는 걸.
무조건 외래어를 배척하자는 말은 절대 아니다. 굳이 수십 년간 먹어 온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미 널리 쓰고 있어 바꾸기가 어렵거나,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국제 용어라면 계속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로구 세종마을 진달래 아파트’에 사는 것, ‘에코델타동 비발디 센트럴 이스트 파크 팰리스’에 사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적절할지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신중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