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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된 농부 가족[이은화의 미술시간]〈317〉

입력 | 2024-05-01 22:10:00


18세기 영국 화가 조지 스터브스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 없었지만 동물화가로 큰 명성을 얻었다. 특히 뛰어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그린 말 그림은 승마를 즐겼던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귀족 취향의 동물화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61세 때 농민의 삶을 포착한 ‘건초꾼들’(1785년·사진)을 그렸다. 왜 갑자기 주제를 바꿨을까?

그림에는 맑은 날 들판에서 농부 가족들이 건초를 실어 나르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왼쪽의 두 여자는 갈퀴로 건초를 쓸어 모으고 있고, 남자들은 수레 위로 건초를 쌓고 있다. 오른쪽에는 수레를 끌 말 두 마리가 대기 중이다. 연푸른 드레스를 입은 가운데 여자는 한 손으로 갈퀴 자루를 잡고 다른 손은 허리춤에 올린 채 똑바로 서서 화면 밖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할 일을 끝낸 후 잠시 쉬는 중인 듯하다. 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지역 농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화가는 농부 가족들이 일사불란하게 일하는 모습을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일반적으로 초상화 속에서 정적인 포즈를 취하던 귀족 가족들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스터브스는 일하지 않는 귀족들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 그림을 그린 걸까? 노동에 대한 찬미나 가난한 시골 농부들에 대한 동정심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천만에! 당시 귀족사회에서 낭만적인 시골 풍경화가 인기를 끌었기에 이에 부응한 것일 뿐이다.

스터브스는 농민의 삶을 포착했으나 이상화해서 그렸다. 그림 속 농부 가족은 험한 노동 중인데도 다들 옷이 깨끗하고 우아하다. 여성들이 쓴 모자도 작업용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장식적이다. 비참한 노동 현실이 아니라 안전하고 이상화된 노동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 그림을 구매하거나 감상할 사람은 귀족이나 부르주아이지 결코 그림 속 노동자 계급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