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긴장이상증과 싸우는 이봉주 근육 수축-경련으로 자세 비틀려… 처음엔 병명도 몰라 점쟁이 스님 찾아 어떤 병인지 알게 되자 억울한 마음… 운동과 재활로 건강 많이 좋아져 “예전 모습 되찾아 풀코스 뛸 것”
난치병과 싸우고 있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 발병 후 4년 만에 나선 레이스에서 100m를 달려 팬들에게서 박수를 받았다. 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때 카메라 앞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는 자세를 잡고 있는 이봉주. 화성=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이런 그가 100m만 뛰다 말았다. 그런데도 박수를 많이 받았다. “다들 너무 좋아해 주셨다. 사인 요청도 많이 받았다. 큰 힘이 됐다.” 등이 약간 굽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며 뛰었던 이봉주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지만 아직 오래 뛸 수 있는 몸 상태는 안 된다. 그래도 오랜만에 뛰어서 많은 에너지를 얻었다”고 했다.》
4년 만에 다시 달린 이봉주를 1일 그가 사는 경기 화성시에서 만났다. 이봉주는 지난달 21일 ‘삼척 황영조 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해 빗속 ‘100m 레이스’를 보여줬다. 대회에 나와 뛴 건 ‘근육긴장이상증’ 발병 후 처음이었다. 매년 가을이면 그의 고향 충남 천안에선 ‘이봉주 마라톤대회’가 열린다. 편치 않은 몸인데 왜 강원도까지 가서 뛰었을까.
“삼척에 처가가 있다. 장인어른이 작년 11월에 돌아가셨다. 살아 계실 때 내가 아프기 전까지는 해마다 같이 뛴 대회다. 이번에도 ‘삼척의 사위’가 왔다며 많은 분들이 반겨주셨다.” 이봉주는 삼척이 고향인 동갑내기 ‘절친’ 황영조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황영조와 중학교 동기다. 대회가 열린 4월 21일은 아내와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허리 부위 낭종 제거 수술을 받은 지 한 달 뒤인 2021년 7월 이봉주의 모습으로 등과 목이 많이 굽어 있다. 이때에 비해 지금은 몸 자세가 많이 좋아진 상태다. 이봉주 가족 제공
병명을 알기까지 1년 넘게 걸렸다.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병원은 다 가봤다. 유명하다는 한의원들도 찾아가 보고 했는데 내가 어떤 병에 걸린 것인지 정확히 아는 데가 없었다.”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에 점쟁이도 찾아갔다. 점쟁이는 ‘조상 묏자리를 잘못 써서 아픈 거’라고 했다. 많은 비에 무너진 조상 묘를 근래 옮긴 적이 있기는 했다. 근데 시기가 맞지 않았다. 묘를 옮긴 건 병이 생기고 난 뒤의 일이다. 굿을 해야 낫는다는 점쟁이 말은 듣지 않았다. 사람 잘 낫게 해 준다고 소문난 스님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별 도움은 안 됐다. “사람이 답답하니까 혹시 하는 마음에 이런 데도 가게 되더라.” 여기저기서 병 고쳐주겠다면서 ‘한번 찾아오라’고 하는 전화도 정말 많이 받았다. 손 안 대고 고쳐주겠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브라질에 사는 교민이 고향 천안 집까지 직접 찾아와 침을 놔주고 간 적도 있다. “효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다들 나를 걱정하고 도와주려 한 분들이니까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병명을 알고 난 뒤에는 어땠을까. 답답한 건 조금 풀렸는데 많이 억울했다고 한다. 이봉주는 “하, 하” 하고 한숨을 두 번 길게 쉰 뒤에 말했다. “살면서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오나 싶더라. 그냥 막 억울하고 그랬다.” 이봉주는 2021년 6월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허리 부위에 있는 낭종(囊腫·주머니 모양 혹)을 제거하면 몸이 좋아질 수도 있다고 했다. 6시간에 걸친 수술이었는데 이후로 나아진 건 없었다. 등판 한가운데엔 20cm 가까이 되는 긴 칼자국이 남았다. 병명은 이제 알게 됐지만 어쩌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게 됐는지 이유는 아직 모른다.
병세가 많이 안 좋았을 때는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탔다. 이봉주는 “아이고” 하면서 또 한 번 한숨을 내뱉은 뒤 말했다. “아흔이 다 돼 가는 어머니도 아직 안 짚는 지팡이를 이 나이에 내가 짚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머니는 아직도 허리가 꼿꼿한 편이다. 건강, 체력만큼은 최고로 자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지팡이라니. 너무 창피했다.” 이봉주는 집 밖으로 나가기가 싫어지면서 사람을 만나는 일도 줄었다. 앉아 있는 게 힘들었고 누워 있어도 배가 이리저리 계속 움직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도 말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심했다. 아프기 전까지는 매일 아침 15∼20km를 달렸던 이봉주다.
아프기 전까지 이봉주는 누가 피곤하다는 소리를 하면 ‘왜 피곤하지?’ 하고 이해를 잘 못했다고 한다. 만나는 친구들이 어디가 아프다, 어디가 쑤신다고 할 때도 ‘우리 나이에 벌써?’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봉주는 살면서 잔병치레가 거의 없었다.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수술이나 이렇다 할 부상이 없었다. “건강 하나만큼은 진짜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렇게 되고 보니까 이건 뭐지 싶더라.” 그제야 아프다고 하는 사람들 말을 공감하게 됐다는 이봉주는 “기회가 되면 앞으로 장애인이나 아픈 사람들을 돕는 봉사도 많이 하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다 하는 바람도 생겼다. ‘한국 마라톤 발전에 기여’ 그리고 ‘아프지 않고, 재밌게 살기’다.
15년 전 기자는 이봉주의 은퇴 경기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2009년 10월 대전에서 열린 제90회 전국체육대회 마라톤 남자 일반부 경기가 선수로서 이봉주의 ‘마지막 레이스’였다. 그때 어머니 공옥희 씨(87)는 출발지인 대전 한밭종합운동장에 아침 일찍 나왔다.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는 “평소엔 안쓰러워서 아들이 뛰는 걸 못 봤는데 오늘이 끝이라고 해서 왔다. 우리 아들 힘내라”고 했었다. 당시 이봉주는 20년 마라톤 인생을 전국체전 금메달로 마무리했다. 풀코스 마지막 완주였다. 뛰는 것도 안쓰러워 보지 못했던 어머니는 3년 전 등허리가 굽은 막내아들을 처음 봤을 때 많이 울었다. 발병 후 이봉주는 천안에 있는 어머니를 한동안 찾아가지 않았다. 걱정 끼치기 싫어서였다. 이봉주는 2남 2녀 중 넷째다.
이봉주는 운동을 늦게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마라토너에겐 불리한 평발로 태어났다. 평발은 오래 달리면 아프다. 게다가 짝발이었다. 왼발이 오른발보다 4mm 정도 크다. 스피드도 처음엔 별로였다. 이봉주는 자기가 평발이란 걸 모르고 마라톤을 시작했다. 다행히 달릴 때 아픈 줄을 몰랐다고 한다. 평발이란 걸 알게 된 건 운동을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발바닥을 본 코치가 알려줬다.
선수로 타고난 게 별로 없으니 노력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한번 시작하면 도중에 그만두는 일은 없었다. 포기를 모르고 살았다. 참고 버티는 힘, 끈기 하나는 타고났던 것 같다.” 노력과 끈기로 이봉주는 많은 걸 이뤘다. 24년째 깨지지 않고 있는 마라톤 풀코스 한국기록을 남겼다. 하프코스 한국기록도 이봉주가 갖고 있다. 이건 32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고 아시안게임을 2연패했다. 서울마라톤 겸 동아마라톤, 보스턴 마라톤을 포함해 국제 대회에서 모두 7번이나 우승했다.
이봉주는 이제 선수가 아니지만 마라톤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남아 있다. 풀코스 42.195km 완주다. 선수 시절 이봉주는 풀코스를 40번이나 완주했다. 이 부문 세계기록이다. 이봉주 다음으로 완주를 많이 한 선수는 호주의 스티브 모네게티인데 25회로 차이가 크게 난다. 4년 만의 레이스에서 100m를 달린 이봉주는 “건강을 차츰 회복해 가면서 하나씩 도전해 나가겠다. 10km를 달리고 다음엔 하프코스, 그다음엔 풀코스다”라고 했다.
화성=이종석 스포츠부장 w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