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임수 논설위원
국내 원자력발전소를 흔히 ‘화장실 없는 아파트’에 비유하는 이들이 있다. 원전을 가동하면 필연적으로 사용후 핵연료가 배출되는데 지금껏 이를 영구 처분하는 시설, 즉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방폐장)’ 없이 임시로 보관해 왔기 때문이다. 경북 경주에 2015년부터 운영 중인 방폐장이 있지만 원전에서 쓴 작업복, 부품 같은 방사능 세기가 약한 중·저준위 폐기물만 처분할 수 있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은 1980년대부터 아홉 차례에 걸쳐 부지 선정이 시도됐지만 주민 반발과 여야 갈등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격렬한 반대 시위를 불러온 2003년 ‘부안 사태’로 사회적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후 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 두 번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도출된 게 특별법 제정이다. 고준위 방폐장 설립 근거와 부지 선정 절차, 유치 지역 지원 등을 담은 견고한 법제도를 만들어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자는 취지였다.
6년 뒤 사용후 핵연료 처리 한계
하지만 특별법은 지난 20대 국회에 이어 또다시 자동 폐기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동안 줄다리기하던 특별법 세부 내용을 두고 여야가 잠정 합의했지만, 야당의 ‘채 상병 특검법’ 단독 처리 등으로 극심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어서다. 이번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는 29일까지 3년 전 발의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특별법’이 통과될지 미지수다.
‘고준위 특별법’ 21대 국회서 처리해야
첫발도 떼지 못한 한국과 달리 선진국들은 고준위 방폐장 건설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반세기 넘게 쌓인 핵폐기물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원전 발전 의존도가 40%에 달하는 핀란드는 내년에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폐장을 완공한다. 스웨덴과 프랑스는 부지를 정하고 건설 준비 단계에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방사성폐기물에 민감한 일본마저 부지 선정 작업에 돌입했다. 세계 10대 원전 운영국 가운데 부지 선정 절차를 시작하지 못한 나라는 한국과 인도 두 곳뿐이라고 한다.
한국이 30조 원대 원전 수출을 위해 공들이는 체코도 4개의 후보지를 정한 데 이어 유럽연합(EU)의 친환경 정책에 맞춰 건설 일정을 앞당기고 있다. 앞서 EU는 원전을 친환경 투자 기준(녹색분류체계)에 포함시키면서 고준위 방폐장 건설을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방폐장 건설 계획을 세우지 못하면 재도약을 선언한 K원전의 유럽 수출길이 막힐 수 있다는 얘기다.
원전이 경제적이면서 탄소 배출이 없는 청정 에너지원이긴 하지만 사용후 핵연료가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까지 수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방폐장 건설을 외면하는 건 현 세대가 값싼 전기의 혜택은 다 누리면서 부담은 미래세대에 전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고준위 방폐장을 짓는 데 30년 넘는 긴 시간이 걸린다. 당장 특별법이 통과된다 해도 늦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탈원전 대 친원전 프레임에 갇혀 폐기물을 후대에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를 이젠 멈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