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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갈등의 근원은 1936년 아랍 대봉기”

입력 | 2024-05-04 01:40:00

[책의 향기]英의 ‘유대인 이민 지지’ 선언 후
아랍인 폭력 시위에 보복 악순환
역사서로서 객관적 서술 돋보여
◇팔레스타인 1936/오렌 케슬러 지음·정영은 옮김/528쪽·2만8000원·위즈덤하우스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 봉쇄를 요구하는 친팔레스타인 시위대에 맞서 친이스라엘 시위대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앞에서 국기를 흔들고 있다. AP 뉴시스


“돈을 내놓아라.”

1936년 4월 15일 유대인 닭 판매업자 이스라엘 하잔은 현재의 텔아비브 근처에서 아랍인들에게 협박을 당했다. 하잔은 트럭에 닭을 싣고 언덕길을 올라가던 중이었다. 바리케이드 때문에 멈춰 섰는데, 얼굴을 가린 아랍인들이 총을 든 채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하잔은 돈이 없다며 살려달라고 했지만 아랍인들은 그를 살해했다.

이날 아랍인들의 범행은 2년 전 아랍 비밀 결사조직인 ‘검은 손’ 설립자가 영국 위임통치 정부의 경찰에 의해 피살당한 영향이 컸다. 제국주의 영국과 유대인 이민자들에 맞서 팔레스타인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지도자가 죽자 복수심에 사로잡힌 아랍인들이 유대인을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다음 날 더 커졌다. 강경파 유대인 2명이 바나나농장의 노동자 숙소에 들어가 권총을 11발 발사해 아랍인 2명을 죽였다. 이후 아랍인들은 거리에 모여 복수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시위를 벌이고 공공시설을 파괴하며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 정착하던 유대인들을 테러했다. 팔레스타인 땅은 점차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신간은 미국 출신으로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가 1936∼1939년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진 ‘아랍 대봉기(Great Revolt)’에 대해 쓴 역사서다. 대봉기의 단초가 된 건 1917년 ‘밸푸어 선언’이었다. 팔레스타인 땅에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유대인들의 아이디어에 영국 정부가 지지를 선언하면서 유대인 이민자가 늘기 시작한 것. 1937년 팔레스타인에 거주한 유대인은 약 40만 명으로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했다. 유대인은 이후에도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정착촌을 곳곳에 건설하고 각종 현지 산업을 장악해 나갔다.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 정부의 도움도 유대인들의 세력 확대에 일조했다.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이 가자지구로의 진입을 기다리고 있다. AP 뉴시스 

대봉기 당시 아랍인들은 폭력 시위를 벌였다. 이에 영국 정부 휘하의 경찰이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극단적인 유대 시온주의자들도 가세했다. 이로 인해 3년에 걸친 대봉기 기간 아랍인 4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됐다. 8000여 명의 아랍인 사망자 중 1500여 명이 같은 아랍인에 의해 살해될 만큼 내분도 벌어졌다.

특히 저자는 대봉기를 거치며 오히려 유대인들이 각성했다고 분석한다. 아랍인의 공격을 받은 유대인들이 무력 보복을 강화했다는 것. 당대 최강을 자랑한 영국군의 지원을 받으며 유대인 군대는 성장했다. 유대인들은 전략 요충지에 정착촌을 추가로 건설하며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해 나갔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아랍인들의 반(反)이스라엘 저항운동인 인티파다가 1987∼1993년 1차, 2000년 2차에 걸쳐 벌어지는 등 수많은 분쟁이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이 아직도 건재한 이유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이란 무력갈등을 촉발시킨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원을 아랍 대봉기 사건에서부터 찾는 접근법이 흥미롭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중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태도도 역사서로서 장점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