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가진 고 임영웅 산울림 대표.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과거 동아방송에서 PD로 재직하며 연극 연출 작업을 동시에 했었다”며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회사와 선후배들이 무언의 후원자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DB
고도를 기다리던 사나이가 떠났다. 한국 연극계의 대부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가 4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라별예대 연극영화학과 재학 시절 ‘사육신’으로 연출로 데뷔했다.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갔던 휘문고 2학년 때 연극제를 열 정도로 당돌하고 끼 많은 소년이었다. 졸업한 후 세계일보, 조선일보, 대한신보 기자를 거쳐 동아방송과 KBS에서 PD를 했다. 또 국립극단 이사와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한국연극연출가협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1985년 고인이 아내인 오증자 서울여대 명예교수와 함께 사재를 털어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자신의 집을 헐고 지은 산울림 소극장은 고전 연극의 산실이었다. 이 곳에서 올린 첫 작품도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산울림 소극장은 ‘연극학교’로 불리며 수많은 연출가와 명배우를 배출했고, 연극이 침체됐을 때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 붐을 주도하면서 중년 여성이라는 새로운 관객층을 개발했다. 주부를 대상으로 한 평일 낮 공연을 기획해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대표적으로 박정자의 ‘위기의 여자’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 손숙의 ‘담배 피우는 여자’가 산울림 소극장에서 탄생했다.
고인의 연출 스타일은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자로 잰 듯한 연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희곡 분석 작업부터 얼마나 철저했는지는 그의 연출 노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배우의 호흡과 동선, 심리 상태가 대본에 빼곡히 적혀있다.
고인이 한국 연극계의 대부로 불리는 까닭은 척박한 현실에서도 끝까지 무대를 지켰기 때문이다. 고인은 “한국에서 연극을 하는 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가 술자리에서 했던 “산울림 소극장을 폭파하고 싶다”는 말은 유명하다. 극장을 폭파하면 사회면 톱기사가 돼 어려운 소극장 현실에 관심을 가져줄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고행과도 같은 소극장 운영을 그는 묵묵히 이어갔다. 연극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며 영원한 현역으로 남길 원한 고인은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70여 년간 활동하며 마지막까지 연극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산울림 소극장은 딸 임수진 씨가 극장장을 맡아 하드웨어를 담당하고 아들 임수현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가 예술감독으로 콘텐츠 운영을 맡고 있다.
고인은 1966년 한국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옵서예’를 통해 본격적인 창작 뮤지컬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꽃님이!꽃님이!’ ‘지붕위의 바이올린’ ‘키스 미 케이트’ ‘갬블러’ 등을 연출하며 뮤지컬 연출의 초석을 닦았다.
유족으로는 배우자인 오증자 서울여대 명예교수와 아들 수현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산울림 소극장 예술감독), 딸 수진 산울림 소극장 극장장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7일 오전 8시. 02-2072-2010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