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현지 시간) 튀르키예 무역부는 “이스라엘과 관련 있는 모든 물품에 대한 수출과 수입을 중단한다”며 “튀르키예는 이스라엘 정부가 가자지구에서 충분한 인도적 지원을 할 때까지 엄격하고 단호하게 이번 조치를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튀르키예는 그동안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지난해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이 원인)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이미 튀르키예는 지난달 9일 이스라엘에 휴전 선언과 인도주의적 지원 허용을 촉구하며 54개 물품에 대한 수출을 제한했다. 이번 조치는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가자지구에서 군사 작전을 진행하고, 조만간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대거 밀집해 있는 라파(가자지구 남쪽으로 이집트와의 국경 지대)에서 대규모 지상전을 감행하려 하는 것에 대한 ‘추가 대응’이다.
지난해 10월28일(현지 시간) 튀르키예 최대 도시이며 경제중심지인 이스탄불에서 열린 이스라엘 규탄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자국기와 팔레스타인기를 함께 흔들고 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고,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구호를 집회 중 외쳤다. 집회에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도 참석했다. 이스탄불=AP 뉴시스
중동 주요국, 나아가 전세계 이슬람권의 ‘리더 국가’를 지향하는 나라 중 이란을 제외할 경우 튀르키예의 이번 조치는 가장 강경한 ‘대(對)이스라엘 대응’으로 꼽힌다. 이란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를 지원해 왔다. 최근에는 이스라엘과 서로 상대의 본토를 공격하는 직접적인 군사 충돌도 벌였다. 특히 이번 튀르키예의 조치는 ‘아랍권의 맹주’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이스라엘에 대한 대응을 거의 하지 않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모습과도 크게 구별된다.
튀르키예는 왜 이스라엘에 ‘교역 전면 중단’이란 강경한 ‘압박 카드’를 꺼내든 것일까.
이란은 튀르키예에 이어 이스라엘을 정식 국가로 인정했고, 외교 관계도 수립했다. 그리고 두 나라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1979년 ‘이슬람 혁명’을 계기로 신정공화정 체제를 수립하고 ‘이슬람 근본주의’, ‘반이스라엘’ 성향으로 변했다. 이제 이란과 이스라엘은 각각 서로를 ‘작은 사탄’, ‘테러 지원 국가’로 부른다. 두 나라는 ‘세계의 화약고’ 중동에서도 대표적인 앙숙으로 꼽힌다.
에브라힘 라이시(왼쪽) 이란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1월24일(현지시각) 튀르키예 앙카라의 대통령궁에서 공동 기자회견 뒤 악수하고 있다. 이란과 튀르키예는 현재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스라엘을 가장 강하게 비판해온 나라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최근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벌였고, 튀르키예는 교역 전면 중단을 선언했다. 앙카라=AP 뉴시스
사실상 이슬람권 주요국 중 가장 오랜 기간 이스라엘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어온 나라가 튀르키예인 셈이다.
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 최근 튀르키예의 강도 높은 이스라엘 압박 움직임에는 원인이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최근 정치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며 사실상 2033년까지 집권이 가능해졌다. 2003년 내각책임제 시절 총리에 오르면서 튀르키예의 최고 권력자가 된 에르도안 대통령으로서는 30년간 최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지난해 10월28일 이스탄불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지지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2003년부터 튀르키예를 이끌고 있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심각한 경제 위기로 최근 큰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 조치에는 보수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평가가 많다. 이스탄불=AP 뉴시스
이처럼 살인적인 물가 상승은 3월 진행된 튀르키예 지방 선거에서 집권당이 완패한 이유로 꼽힌다. 당시 제1야당 공화인민당(CHP)은 수도 앙카라와 경제중심지 이스탄불을 포함해 주요 대도시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정의개발당(AKP)에 승리했다.
결국 튀르키예 안팎에서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수 유권자의 지지를 더욱 얻어내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일종의 돌파구 찾기인 것. 과거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튀르키예로부터 분리·독립 움직임을 보이는 반튀르키예 성향 쿠르드족 무장단체에 대한 강경한 모습을 보인 바 있다.
시리아, 리비아, 아제르바이잔 등 중동과 동유럽에서 군사 활동에 적극 나서고, 현지 ‘친튀르키예’ 세력을 다양한 형태로 지원해 왔다. 중동 패권을 놓고 경쟁 중인 사우디의 반발 속에서도 ‘사우디 코 앞’인 카타르에도 군대를 파병하기도 했다.
2021년 11월 튀르크어 계열 언어를 쓰는 동유럽,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튀르크어 사용국가 기구(Organization of Turkic States·OTS)’도 결성했다. 정식 회원국은 튀르키예,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이다. 헝가리와 투르크메니스탄은 참관국이다. 모두 튀르키예의 전신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에 세워진 나라들이다. 지정학과 자원 측면에서 중요한 나라들이란 공통점도 있다.
튀르키예의 상징 건축물로 꼽히는 아야 소피아는 동로마 제국의 유산으로 성당이었다.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케말 파샤)가 1934년 세속주의를 강조하며 아야 소피아를 종교시설이 아닌 박물관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020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야 소피아를 이슬람 사원으로 바꿨다. 동아일보 DB
말 그대로, 에르도안 정권은 ‘강한 튀르키예’, ‘지역의 중심국가’, ‘이슬람권의 대표 국가’를 지향해 온 것. 에르도안 대통령이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재건’을 지향하고 있다는 평가도 많다.
이번 이스라엘과의 교역 중단을 놓고도 에르도안 대통령의 국내 정치 어려움의 돌파구 찾기, 나아가 주변 국가에 대한 적극적인 영향력 행사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세형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