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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행 처리 vs 거부권…10번째 ‘데자뷔’ 되나[김지현의 정치언락]

입력 | 2024-05-06 14:00:00


5월 2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민의힘 의원석이 비어있다. 국민의힘은 이날 여야 간 합의되지 않은 ‘채 상병 특검법’이 최종 상정된 것에 항의하며 표결 전 본회의장에서 빠져나갔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S#1. 여의도 국희의장실 앞 (5월 2일 오전)
여야 원내대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온다.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마지막 합의 시도가 또 실패했다.

5월 2일 본회의에 앞서 국회의장실에서 열린 회동을 ‘빈손’으로 마치고 나온 국민의힘 윤재옥(왼쪽) 원내대표 겸 당 대표 권한대행과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가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뉴시스



S#2. 국회 본회의장 (오후 3시 10분)
거야(巨野)의 전방위 압박을 못 이긴 더불어민주당 출신 김진표 국회의장이 결국 본회의장에서 여야 원내대표를 마지막으로 단상 앞으로 불러낸다.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터진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와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가 김 의장과 심각한 표정으로 국회의장석 앞에서 약 5분가량 대화를 나눈다. 윤 원내대표는 한껏 곤란하다는 제스처를 취하다 결국 단상에서 내려온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국회의장석을 향해 야유를 보낸다. 자리에서 고성을 보낸 뒤 퇴장을 시작한다.)

5월 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진표 국회의장(왼쪽)이 채 상병 특검법 상정 직전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가운데)와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오른쪽)를 국회의장석 앞으로 불러내 마지막으로 중재를 시도하고 있다. 박형기 기자



S#3. 국회 본회의장 (오후 3시 27분)
김 의장 “재석 168인 중 찬성 168인으로 법률안 가결을 선포합니다”

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운데)가 정청래 최고위원(오른쪽)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박형기 기자

같은 날 같은 자리에 참석한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오른쪽)와 유의동 의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박형기 기자



S#4. 국회 본청 로텐더홀 (오후 3시 41분)
국민의힘 의원들이 규탄대회를 연다.
다 같이 “반민주적 반의회적 입법폭주 규탄한다” “임기 말 협치타개 국회의장 각성하라”
(각자 손에는 ‘입법폭주 규탄한다’고 적힌 항의 피켓이 들려있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겸 대표 권한대행과 2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채 상병 특검법이 여야 합의 없이 상정돼 야권 단독으로 처리된 것에 대해 항의하는 규탄 대회를 열고 있다. 뉴스1



S#5. 용산 대통령실 (오후 5시 3분)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 “대통령실은 민주당의 일방적인 입법폭주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2일 국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이 통과된 지 1시간 반 만에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실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이미 다 본 것 같고, 안 봐도 결말을 알 것 같은 데자뷔입니다. 21대 국회 들어서만 여야와 대통령실이 무려 9번째 마치 도돌이표처럼 반복해 온 ‘신’들이죠. 진짜 영화 대본이었다면 진즉 망했을 영화입니다.

지난해 4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시작으로 간호법, 노란봉투법, 방송법 3개, 김건희 여사 특검법,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위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에 따라 모두 다시 국회로 돌아왔고요. 이 중 이태원참사특별법만 여야가 극적으로 합의해 2일 본회의에서 통과시켰고, 나머지는 모두 재의결에 실패했습니다. 이미 폐기됐거나, 21대 국회 임기 종료(5월 29일)와 함께 폐기될 운명이죠.

마치 짜여진 각본이라도 있는 듯 정치권은 매번 같은 과정, 같은 대사를 되풀이해왔습니다. 민주당은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는 반면, 그에 비해 국민의힘은 너무 무기력하죠. 그리고 대통령실은 ‘최후의 보루’로 써야 할 대통령의 ‘거부권 카드’부터 곧바로 꺼내드는 식입니다.

이날 야당 단독으로 통과된 채 상병 특검법도 10번째 ‘데자뷔’가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본회의 당일 오전까지 여야 합의를 시도했던 국회의장실 관계자들도 “국회 임기 마지막까지 이러는 건 처음 봤다”고 혀를 차더군요. 한 관계자는 “민주당은 정말 전례가 없을 정도의 전방위 압박을 해오는데, 국민의힘은 ‘그냥 차기 원내대표랑 협상하라’는 식이었다. 협상할 의욕도, 소속 의원들을 설득할 리더십도 없어 보였다”고 전했습니다. 역시나 대통령실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특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자마자 곧장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며 항의했고요.

“대통령실은 민주당의 일방적인 입법 폭주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민주당의 특검법 강행 처리는 채 상병의 안타까운 죽음을 이용해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악용하려는 나쁜 정치다. 오늘 일방 처리된 특검법이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사례로 남을 것이라는 우려가 큰 만큼 대통령실은 향후 엄중하게 대응할 것이다.” (2일,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

“사법 절차에 상당히 어긋나는 입법 폭거다. 대통령이 아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대통령이 이걸 받아들이면 나쁜 선례를 남기는 거고, 더 나아가서 직무 유기가 될 수 있다.” (3일, 홍철호 대통령 정무수석)

사실상 10번째 거부권 행사를 위한 명분 쌓기 수순으로 해석됩니다. 애꿎은 국민들만 이 재미없는 시나리오를 한 번 더 봐야 하게 생겼습니다.

더 암울한 건 22대 국회도 그다지 나을 건 없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범야권 의석이 아예 200석을 넘겼으면 모르겠는데, 192석은 상당히 애매한 숫자”라며 “윤 대통령 입장에서도 21대 국회의 180석을 대할 때와 스탠스가 달라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초유의 거야라지만, 대통령의 거부권 앞에서 무력하긴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구조적으로 야당이 강행처리하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핑퐁 릴레이’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 국회에서 재의결되려면 재적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합니다.)

야권은 “22대 국회에서는 국민의힘 의석수가 21대의 113석보다 적은 108석이고, 범야권은 192석에 이르는 만큼, 국민의힘에서 8명만 이탈해도 주요 쟁점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기대감에 부풀어있지만 그건 그 때 가봐야 아는 거죠. 야권이라고 계속 똘똘 뭉치기만 할 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5월 2일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에서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 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의 가결이 선포되는 순간 손뼉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방청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 모습. 뉴시스

2일 국회 본회의장 2층의 방청석에는 보라색 점퍼를 입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 20여 명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보라색은 이태원 참사를 상징하는 색상이라 합니다. 이들은 2022년 10월 참사가 발생한 지 551일 만에야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 문턱을 넘는 것을 지켜보며 얼굴을 감싸 쥔 채 오열했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눈물을 닦았습니다.

이들은 4개월 전인 올해 1월에도 같은 자리에 앉아 눈물을 흘렸었죠. 그 날도 저 위 시나리오와 똑같이, 특별법이 야권 단독으로 통과되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항의하며 본회의장을 떠나버렸습니다. 윤 대통령은 국회를 통과해 정부로 넘어 온 특별법에 즉각 거부권을 행사했고요.

유가족들은 이날 본회의가 끝난 뒤 “시간이 이렇게 많이 걸릴 일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여야가)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도 할 수 있는 일을 왜 정쟁거리로 삼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지겹도록 몇 년째 계속 똑같은 장면만 되풀이 중인 여야와 대통령실 모두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호소입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