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어린이는 한 사회의 미래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동 인권 개념이 제대로 자리잡은 건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아동 인권의 역사는 소파 방정환 선생(1899∼1931·사진)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나라가 풍비박산이 나던 구한말 태어난 선생은 15세 때 춘원 이광수가 펴내던 잡지 ‘청춘’에 글이 실리면서 등단할 정도로 문학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워 상업학교로 진학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이 선생에게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길 권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어려운 경제 사정과 개인적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훗날 선생은 ‘만일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조선은행 서기가 됐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920년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도쿄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도요대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에선 어린 아이들을 ‘얼라’나 ‘어린 놈’같이 다소 낮춰 부르며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동 인권에 천착하게 된 선생은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어린이’라는 호칭을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선생은 아동 인권 관련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1921년 동지들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해 소년 운동을 전개했고, 아이들에게도 존댓말을 쓰자는 주장과 함께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했습니다. 또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내고 우리나라 첫 순수 아동 잡지 월간 ‘어린이’도 창간했습니다. 당시 10만 부나 팔렸다고 하니 대단한 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23년에는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했습니다.
서른 둘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선생의 평생은 어린이 인권과 문화를 위해 헌신한 삶이었습니다. 그가 만든 어린이날(5월 1일)은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됐다가 1945년 독립하면서 5월 5일로 부활했습니다. 어린이날을 지내며 선생의 말을 되새겨 봤습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