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광화문에서/김지현]강행 처리 vs 거부권… 10번째 ‘데자뷔’ 되나

입력 | 2024-05-06 23:10:00

김지현 정치부 차장


S#1. 여의도 국회의장실 앞(5월 2일 오전) 여야 원내대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온다.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마지막 합의 시도가 또 실패했다.

S#2. 국회 본회의장(오후 2시 6분) 거야(巨野)의 전방위 압박 속에 더불어민주당 출신 김진표 국회의장이 결국 본회의를 열었다. 특검법을 상정하기 직전, 김 의장은 여야 원내대표를 마지막으로 단상 앞으로 불러낸다(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터진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곤란하다는 제스처를 취한 뒤 의원들을 이끌고 퇴장한다. 10분 뒤, 김 의장 “재석 168인 중 찬성 168인으로 법률안 가결을 선포합니다.”

S#3. 국회 본청 로텐더홀(오후 3시 41분) 국민의힘 의원들이 규탄대회를 시작한다(손에는 항의 피켓이 들려 있다).

S#4. 용산 대통령실(오후 5시 3분)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 “대통령실은 민주당의 일방적인 입법폭주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21대 국회에서 여야와 대통령실이 이미 9번째 반복한 장면이다. 진짜 영화 대본이었다면 진즉 망했을 영화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시작으로 간호법 제정안, 노란봉투법, 방송법 3개, 김건희 여사 특검법,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 이태원참사특별법이 똑같은 과정을 거쳐 국회를 통과했고,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에 따라 모조리 국회로 돌아왔다. 이 중 이태원참사특별법만 여야가 본회의 직전 극적 합의해 이날 통과시켰고, 나머지는 모두 재의결에 실패했다. 매번 민주당은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고, 국민의힘은 너무 무기력했다. 그리고 대통령실은 최후의 보루여야 할 거부권 카드부터 곧바로 꺼내 드는 늘 똑같은 대본이다.

이날 야당 단독으로 통과된 채 상병 특검법도 10번째 반복될 ‘데자뷔’가 될 가능성이 크다. 국회의장실 관계자는 “국회 임기 마지막까지 이러는 건 정말 처음 봤다. 민주당은 역시나 전례없는 전방위 압박을 했고, 국민의힘은 ‘그냥 차기 원내대표랑 새로 협상하라’는 식이었다. 더 이상의 의욕도, 리더십도 없어 보였다”고 했다. 대통령실도 특검법이 통과되자마자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면 나쁜 선례를 남기는 것이고, 더 나아가 직무 유기가 될 수 있다”며 거부권 행사를 위한 명분 쌓기에 돌입했다.

더 암울한 건 22대 국회도 그닥 나을 게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범야권이 아예 200석을 넘겼으면 모르겠는데, 192석은 상당히 애매한 숫자”라며 “윤 대통령 입장에서도 21대 국회의 180석을 대할 때와 스탠스가 달라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아무리 초유의 거야라지만, 대통령의 거부권 앞에 무력하긴 마찬가지라는 거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 국회에서 재의결되려면 재적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참사 발생 551일 만에야 특별법이 국회 문턱을 넘는 것을 지켜보던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여야가)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도 할 수 있는 일을 왜 정쟁거리로 삼았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올해 1월에도 법이 통과됐다가 다시 국회로 돌아오는 걸 지켜봐야 했다. 계속 똑같은 시나리오만 반복 중인 여야와 대통령실 모두 뼈아프게 새겨야 할 호소다.



김지현 정치부 차장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