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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꽃제비’가 탈북민 지원 전담 국회 보좌관이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 2024-05-01 08:00:00


4년 동안 국회에서 보좌관으로 일해 온 박영철 씨가 국회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북한 북부 함경북도 무산군에는 아시아 최대의 자철광 노천광산으로 알려진 ‘무산광산’이 있다. 신분세습이 유지되는 북한에선 광산 마을에서 태어나는 순간 남자 아이들의 운명은 90%쯤 비슷하게 흘러간다.

중학교를 졸업해 군에 입대해 청춘을 바치고, 다시 광산에 돌아와 광부가 되는 것. 여자 아이들은 자라서 누구랑 결혼하는 가에 따라 신분이 좀 더 다양하게 분화된다. 광부는 북한에서 노동계급이라는 사회성분에 속하지만,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이 광부로 일생을 마칠 일은 거의 없다.

1981년 무산광산에서 태어난 남자 아이 중 적어도 세 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의 굴레를 벗어버렸다. 이들은 서울에 와서 모두 훌륭하게 뿌리를 내렸다. 4월 30일 현재 기준으로 한 명은 통일부 6급 공무원이 됐다.

▶ 통일부 6급 공무원이 된 탈북청년…“고향 가는 날을 위해 삽니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40129/123283920/1)

다른 한 명은 국회에서 4급 의원 보좌관이, 나머지 한 명은 공공기관 차장이 됐다.

이들 셋에겐 공통점이 있다. 10살쯤부터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배고픔 속에 자랐고, 13살 때부터는 숱한 사람들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을 경험하며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리고 10대 시절 두만강을 넘나들며 가족을 먹여 살리다가 한국으로 왔다.

그 중 한 명인 박영철은 16세부터 시작해 4년 동안 두만강을 50번 이상 넘나들었다. 북한에서 잡힌 일을 빼고도, 중국에서만 4번 체포돼 강제송환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국경을 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탈북후 중국에서 한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살았던 박 씨. 뒷줄 왼쪽 흰색 강아지를 안고 있는 아이가 박 씨다.



● 반동의 손자로 태어나다
박영철은 태어날 때부터 ‘처단자’의 손자로 출신성분이 결정돼 있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평양에서 잘 나가는 전기기술자였다. 1970년대 외할아버지는 어느 비밀 터널 전기시설 공사에 차출됐다. 공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비밀을 유지하겠다는 손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공사가 끝나고 얼마 뒤 외할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지인들에게 자신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말했다. 이것이 보위부 귀에 들어가 외할아버지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리고 1주일 뒤 집 앞에 도착한 트럭을 타고 온 가족이 무산으로 추방됐다. 외할아버지 소식은 더는 알 수 없었다. 비밀 처형됐거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무산에 끌려온 박 씨의 어머니는 광산 노동자로 일하던 고아 출신의 남성을 만나 결혼했고, 1982년 첫째로 박 씨가 태어났다. 8년 뒤엔 남동생도 생겼다.

무산광산에서는 1992년경부터 배급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이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북부지역은 1990년대 초부터 이미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배를 곯는 일이 일상화됐다. 그나마 겨우 버텼지만 1994년 이후부터는 배급마저 끊겼다.

박 씨는 13살 때부터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산에 올라가 나물을 뜯거나 장작용 나무를 만들어 팔았다. 인근에 사는 어머니 친척들을 찾아 도움을 청해 입에 풀칠하는 일도 적잖았다. 평양에서 죽은 김일성을 위한 화려한 궁전이 건설되고 있을 때 광산 마을에선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은 출석부에 올려진 인원의 20%도 되지 않았다.

탈북 후 연변에서 농사일을 하던 때의 박 씨.



● 인신매매에 걸려 사라진 어머니
1997년 1월 말 갑자기 어머니가 사라졌다. 수소문해보니 중국에 갔다 온 동네 젊은 청년이 “중국에 가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어머니를 꼬드겨 데려갔다고 했다. 북한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그즈음부터 북-중 국경일대에선 인신매매가 시작됐고, 박 씨 모친은 첫 희생자가 됐다. 중국만 가면 일자리가 풍족해 큰 돈을 벌어 올 수 있을 것이란 달콤한 유혹에 속아 두만강을 건넜던 수많은 여성들이 중국 깊은 내륙 한족 동네로 강제로 끌려갔다.

16세에 불과했던 박 씨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중국에 가서 어머니를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의 동네에서 두만강은 수십 리 길이지만, 그는 걸어서 두만강까지 갔다. 당시만 해도 어린 아이들에 대해선 국경경비대가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다.

1997년 1월 28일 저녁, 그의 첫 도강이 시작됐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 산에 올랐던 그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 숱한 탈북민들이 있었던 것. 그중에는 방금 건너온 이도 있고, 새벽에 다시 북으로 몰래 건너가기 위해 기다리는 이도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어른들 틈에서 박 씨는 산에서 내려와 10리쯤 걸어가면 마을이 나타나며, 그 마을 어느 집에 가면 인심 좋은 노인이 산다는 정보를 얻었다. 들은 대로 찾아가니 할머니가 그를 맞았다. 그는 “하루 밤에도 10여 명씩 찾아 온다”고 푸념하더니 꽁꽁 얼은 배 하나를 내주었다. 이어 “좀 더 가면 큰 부락이 나오니 거기에서 도와달라고 하는 게 좋다”고 귀띔했다.

다시 큰 부락을 찾아가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렸다. “우리 엄마가 며칠 전 이곳으로 넘어왔다는데, 엄마를 찾아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문을 연 집주인은 “너 중국이 얼마나 큰지 아냐, 그 시간이면 벌써 흑룡강에 가있겠구만. 엄마는 못 찾으니 포기해라”라며 혀를 찼다. 박 씨를 안쓰럽게 여긴 집주인은 약간의 식량까지 내주었다. 박 씨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중국에선 이렇게 무작정 문을 두드려도 식량을 주는구나….”

받은 식량을 숨겨놓고, 다시 다른 집을 두드리니 어느새 20~30㎏이 모아졌다. 엄마를 찾는 것보다 북으로 돌아가 굶고 있을 아버지와 동생에게 식량을 주는 일이 더 급해졌다. 소년의 어깨가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메고 그는 다시 두만강을 넘었다. 그런데 그만 국경경비대에 체포됐다.

그를 취조하던 소대장은 사정이 딱해보였는지 “다시 잡히는 날엔 가만 두지 않겠다”는 엄포와 함께 편지를 적어 배낭에 넣어주며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집에 도착해 열어본 편지에는 “모두가 어렵지만 조국을 절대 배신하면 안 된다. 아버지가 아들을 잘 교육해주면 좋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박 씨는 얼마 뒤 당시 강을 넘으려 했고, 소대장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소대장은 그를 사정없이 때린 뒤 영하 수십 도의 겨울 날씨에 발가벗겨 꽁꽁 얼어 쓰러질 때까지 밖에 세워뒀다.

중국 연변에서 한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던 시기의 박 씨(오른쪽). 왼쪽은 남동생이다.



● 중국군을 찾아간 꽃제비
그런 고초를 겪으면서 구한 식량을 배낭에 담아 메고 집에 돌아가니 쓰러져 누워있던 아버지와 동생이 깜짝 놀랐다. 엄마가 사라진 걱정도 잊은 채 이들은 모처럼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가져온 식량의 절반은 다른 집에 진 식량 빚을 갚는데 쓰고, 나머지는 세 식구가 아껴 먹었지만 보름도 안돼 없어졌다. 당시 아버지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았는데 그걸로 두 아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박 씨는 다시 두만강을 건너 식량을 구해올 결심을 했다. 그때부터 그는 거의 보름에 한 번씩 식량 구걸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는 탈북민들이 중국으로 밀물처럼 몰리던 때였다. 늘어나는 식량구걸에 중국 국경마을의 민심은 싸늘해졌다.

1997년 봄에 접어들면서 중국 사람들은 탈북민이라면 치를 떨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은 일부 탈북민들이 현지인들의 창고를 털어 식량을 훔쳐가거나 개를 잡아가거나 소를 끌고 갔기 때문이다. 탈북민이 강도짓을 했다는 말까지 퍼지면서 민심은 갈수록 흉흉해졌다. 중국 국경경비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어린 박 씨의 구걸도 통하지 않았다.

이듬해 겨울에는 마을을 열심히 돌았지만 먹을 것을 하나도 구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배고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눈앞에 중국군 국경경비대인 ‘변방대’ 건물이 보였다. 그는 무작정 찾아가 밥을 달라고 애원했다. 당황한 군인들 사이에서 한 조선족 장교가 나오더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내가 뭐하는 사람인줄 아느냐”라고 타박한 뒤 밥을 줬다. 이어 중국돈 20위안과 매점에서 사온 즉석 라면과 과자를 내주며 “다시 잡히면 이번엔 세관으로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하지만 라면과 과자 몇 봉지만 가지고 돌아갈 순 없었다. 그는 다시 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녔고, 마침내 식량 한 배낭을 채웠다. 북한 배낭엔 약 25㎏이 들어간다. 그걸 메고 산에 숨었다가 새벽 1시쯤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었다. 그런데 강을 건너면서 물에 빠져 발이 젖어버렸다. 그곳에서 집까지는 25리가 넘었다.

산을 타고 가는데 점점 발에 감각이 사라졌다. 발이 얼면 높낮이 감각도 무뎌져 계속 넘어지게 된다. 가까스로 집 근처 아는 이의 집에 기어가다시피 도착했다. 언발을 녹이려 양말을 벗으려 했지만 피부에 달라붙어 벗겨지지 않았다. 찬물에 발을 담근 채 30분 넘게 있으니 그제야 양말이 녹으면서 피부와 떨어졌다. 두 발은 보라색으로 변했다.

그때 그는 두 달 넘게 동상 치료를 받아야 했다. 발톱이 모두 빠지고 살이 썩어 들어갔다. 북에선 동상을 입어 살이 썩으면 잘라내는 것밖에 치료법이 없었다. 혈기왕성한 10대였던 박 씨는 다행히도 절단하는 일은 피했다. 박 씨는 이를 기적이라 생각한다. 다만 후유증이 남았다. 그는 지금도 한 여름이라도 선풍기 바람이 발에 닿으면 통증을 느낀다. 덕분에 양말을 벗지 못하고 산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 박 씨가 자신이 업고 두만강을 건넜던 남동생을 다시 등에 업고 강물에 들어섰다.



● 동생을 업고 두만강을 건너
3개월쯤 지나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자 박 씨는 또다시 두만강을 찾았다. 집에 있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강을 넘어가 식량을 빌어와야만 아버지와 동생을 살릴 수 있었다.

강을 넘나드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의 활동반경도 넓어졌다. 연길까지 가서 교회도 찾았다. 이 과정에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도 만났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 북한에 있었으면 동창생이 됐을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다보니 중국에서 만나서야 서로가 동창인줄 알았다.

한 번은 같은 동네 세 친구가 큰마음을 먹고 하얼빈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데 기차를 타려다 단속에 걸리고 말았다. 셋은 함께 북송됐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교화소 대신 유랑하며 걸식하는 꽃제비 청소년들을 모아놓는 집결소에 끌려갔다. 사실상 이곳은 청소년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선 병에 걸려도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

세 친구 중 장염에 걸린 한 친구는 방치된 채 죽고 말았다. 그곳에서 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박 씨는 탈출 기회만 노렸고, 결국 석 달 만에 성공했다. 같이 잡혀 끌려갔다 탈출했고, 한국에도 함께 온 친구는 지금 서울의 모 공공기관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박 씨는 중국에서 네 번이나 체포됐고, 북송됐다. 그때마다 나이가 어리다는 점이 고려돼 선처를 받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소년으로 취급받을 수만은 없었다. 1999년 집에 군사동원부(병무청) 사람들이 찾아왔다. 군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도망쳤다.

이후 중국에 있는 한국 식당 앞에서 꽃도 팔고, 돈을 구걸하고, 한국 교회를 찾아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한국 선교사들과 낯을 익혔고, 한국에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동생을 두고 갈 수가 없어 망설였다. 그러다 만 20살이 되던 2001년 언제까지 이런 삶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 5월 그는 도와주겠다는 선교사의 약속에 아버지와 동생을 동반한 한국행을 결심하고, 다시 북한으로 넘어갔다. 집에 도착하니 1주일을 굶어 퉁퉁 부은 아버지와 동생이 그를 맞았다. 동생은 이미 영양실조에 걸려있었다.

한국으로 가자는 얘기에 아버지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며 남동생을 데려가는 것도 거절했다. 며칠을 설득한 끝에 결국 동생만 동행하기로 했다. 두 달 뒤인 7월 그는 12살 동생을 업고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고 다시 두 달 뒤인 9월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루트를 찾았다. 박 씨는 이 루트를 이용한 초창기 탈북민이다.

몇 년 뒤 그의 아버지가 산에서 홀로 굶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좀 더 열심히 설득하지 못했던 일이 그에겐 두고두고 아쉬움과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2014년 탈북 대학생들과 함께 독도를 찾은 박 씨(앞줄 왼쪽). 그 옆이 같은 고향에서 자라 한국에도 함께 온 동갑내기 친구 강원철 씨다. 강 씨는 통일부 6급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에서 22년의 정착
2002년 2월 박 씨는 경기도 안산의 한 공동체 생활시설에 정착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에, 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에 각각 편입됐다.

어린 친구들과 학교를 다니는 일도 쉽지 않고, 오랫동안 공부를 하지 못해 공부가 머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2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중앙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만나본 사람들이 주로 사회복지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졸업해 동생을 먹여 살리려는 생각에 휴학 없이 노력했고, 4년 만인 2008년 대학을 졸업했다. 살아본 동네가 안산이라 그는 대학 졸업 후 다시 안산에서 임대아파트를 얻었다. 대학 졸업 당시 그의 통장에는 불과 30만 원밖에 없었다.

몇 달 동안 일자리를 찾느라 맘고생을 했지만, 결국 시흥 신협에 인턴으로 입사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자리였지만, 그에게는 잘 맞지 않았다. 제2금융권이라 실적을 중시했는데 한국 사회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에게 예금 실적 목표 달성은 불가능한 임무였다.

1년 반 정도 지난 2009년 6월 우양재단이 운영하는 탈북민 사업 담당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는 11년을 근무했다. 맡은 일은 탈북민과 관련된 남북한 프로그램 운영이었다. 처음에는 주임으로 입사했다가 남북청년통합프로그램, 통일축구대회, 통일인재양성 아카데미 운영 등을 담당했고, 경력이 쌓이면서 과장으로 승진도 했다.

일은 보람이 있었다. 통일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나도 통일 관련 일을 오랫동안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012년엔 남쪽 출신 여성과 결혼해 두 딸도 얻었다. 재롱을 부리며 성장하는 두 딸만 보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가 업고 왔던 남동생도 서강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지금은 사무직 회사원으로 잘 지내고 있다.

국회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박 씨. 탈북민 출신이 국회에서 4급 보좌관이 된 것은 그가 최초이다.



● 트라우마 딛고 4급 보좌관으로
2020년 5월 그는 국회의원 5급 보좌관으로 임명됐다.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지만, 당시 탈북민 출신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지성호 의원이 그의 전문성을 인정해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국회에서 일반적인 업무 외에 탈북민 권익센터를 운영하고, 효율적인 탈북민 지원 체제를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국회에 가보니 탈북민을 통일 역군으로 키워야 한다는 말은 정말 많은데, 정작 실행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제가 갔을 때 탈북민정착지원법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다문화가정 지원법과 유사해 보였어요. 탈북민의 현안에 맞춰 정착지원법도 개선되어야 합니다. 또 탈북민은 통일이라는 큰 관점에서 투자 개념으로 꾸준하고 일관성 있게 지원해야 합니다.”

박 씨는 4년 동안 열심히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3월 4급 보좌관으로 임명됐다. 지 의원의 임기 종료와 함께 그도 국회를 떠날 수 있었지만, 22대 총선에서 당선된 탈북민 출신의 박충권 씨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그는 박충권 의원 사무실에서 이전처럼 4급 보좌관으로 국회 업무와 함께 탈북민 관련 정책을 담당한다.

지금까지 입법부에서 활동하는 탈북민은 국회의원에 조명이 집중됐다. 하지만 박 씨처럼 국회 보좌관으로 전문적인 경력을 쌓는 이도 있다. 그가 겪은 북한 경험이 의원이 된 탈북민보다 못한 것도 아니다.

“아직도 저를 괴롭히는 트라우마가 있어요. 10대 시절 두만강을 수없이 넘나들면서 겨울에는 동사한 사람, 여름에는 익사한 시신들을 많이 보았어요. 시신이 퉁퉁 불어나 옷도 다 찢어진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걸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되겠지’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는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런 불쌍한 탈북민들을 위해 입법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일을 한 보좌관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 제 바람입니다.”

그는 중국에서 빌어먹던 꽃제비였던 자신을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만들어준 대한민국이 정말 고맙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선 자신이 롤모델이 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앞으로는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한 탈북민들을 적극 발굴하려 합니다. 언론에는 탈북민이 늘 어렵게 사는 것으로 보도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여러 분야에서 조용히 살면서 누가 봐도 성공한 훌륭한 탈북민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통일을 위한 준비된 역군으로 살도록 적극 도울 생각입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