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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조은아]“‘뤼미에르 형제의 나라’는 옛말”… 佛샹젤리제 극장 30년새 5분의 1로

입력 | 2024-05-07 23:06:00

90년된 극장 사라지는 ‘영화의 도시’
美할리우드 시사회 열던 영화관, 간판 뜯긴 채 쓰레기 봉지만 남아
팬데믹 때 봉쇄하며 관객 줄더니 넷플릭스 인기에 관객 안 돌아와
높은 임대료로 명품에 자리 내줘
佛 제작은 늘지만 美영화에 밀려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UGC노르망디’ 영화관. 올 6월 중 문을 닫는 이 영화관을 포함해 최근 프랑스 곳곳에서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빠른 성장으로 페점하는 영화관이 늘고 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 “수십 년 된 영화관이 없어진다니 정말 아쉬워요. 아름다운 영화관이거든요.”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 ‘UGC노르망디’ 영화관 앞. 가족들과 산책 중이던 시민 신디 그루이아 씨는 이 영화관의 폐점 소식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87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영화관은 이용객 감소로 올 6월 폐관하기로 했다.
팬들이 아쉬워하자 영화관 측은 “오랜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폐관 전에 영화관의 상징적 물건들을 경매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




파리=조은아 특파원

이날 영화관 외부엔 상영을 알리는 포스터들이 외벽에 화려하게 걸려 있었다. 다만 일대를 지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영화관에 입장하는 관객도 거의 없었다. 영화관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변의 명품 매장이나 백화점으로 향했다.

프랑스는 1895년 루이 뤼미에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촬영하는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하고 이듬해 ‘열차의 도착’이란 영화를 시사해 세계 영화의 태동지로 꼽힌다. 이런 프랑스에서도 최근 영화관이 속속 사라지고 있다. 전통과 문화를 중시하는 파리지앵들은 화려한 옛 역사가 깃든 영화관의 퇴출에 특히 아쉬워하고 있다.

‘영화의 시초’ 佛서 영화관 ‘줄폐점’

예술과 문화의 중심인 샹젤리제 거리에서도 영화관의 퇴출을 실감할 수 있다. UGC노르망디 영화관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샹젤리제 고몽’ 영화관이 대표적이다. 현재 이곳은 사실상 폐허 상태다. 간판이 뜯겨나가고 조명이 꺼져 어두컴컴한 영화관 건물 안에 가구 없이 쓰레기 봉지만 뒹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때 이 영화관은 90년의 화려한 역사를 자랑했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 등에 따르면 1930년대 이곳은 고급 상영관과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쓴 안내원으로 유명했다. 창립자이자 제작자인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 베르나르 나탕은 이 영화관을 상업 영화관으로 키웠다. 월트디즈니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큰 성공을 거두며 1938년 18주 연속 상영된 기록을 세웠다.

아픈 역사도 있다. 창립자 나탕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숨졌다.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이 영화관은 나치 장교와 그 손님들만을 위한 영화관으로 바뀌었다.

종전 후 연합군 장교들의 공간으로 쓰이다가 점차 확장돼 1992년 ‘고몽 샹젤리제 마리냥’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 후 프랑스의 굵직한 영화는 물론이고 미국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이 시사회를 여는 대표적인 무대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온라인으로 영화를 소비하는 흐름이 가속화하며 관객이 줄었고, 경영이 악화되자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다른 영화관의 사정도 비슷하다. 현지 매체 프랑스앵포 등에 따르면 샹젤리제 거리에서만 영화관이 최근 30년간 20곳에서 4곳으로 급감했다.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고몽 앙바사드’는 2016년, ‘UGC 조르주 5세’는 2020년 각각 운영을 멈췄다.

파리 교통의 요지 몽파르나스 주변에선 ‘르 브르타뉴’란 영화관이 지난해 폐업했다. 1961년 문을 열어 파리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했지만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랑스 파리 도심의 한산한 극장 앞 모습. 연극, 공연 등을 선보이는 극장 업계는 관객 감소, 임차료 상승 등으로 고전하고 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OTT로 영화 소비 패턴 굳어져

프랑스는 영화의 본고장으로 꼽히기에 이런 현상은 예상하기 힘들었다는 반응이 많다. 프랑스는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찍는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하며 영화의 역사를 열었다. 1902년 영화 ‘달나라 여행’을 만든 마술사 겸 영화감독 조르주 멜리에스는 공상과학(SF) 영화의 창시자 격으로 꼽힌다.

‘파테’ ‘고몽’ 같은 영화 제작사 또한 1910년대 관련 시장을 빠르게 개척했다. 1920년대 영화예술의 본질을 찾는 운동인 아방가르드(전위예술)는 프랑스 영화의 예술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생겨난 ‘누벨 바그’(새로운 물결)란 영화 사조도 세계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점한다.

영화가 태동한 프랑스에서마저 영화관이 사라지는 건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때문으로 풀이된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올해 프랑스의 OTT 시장 매출은 56억3000만 달러(약 7조65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2024∼2029년의 OTT 연평균 수익 증가율 전망치 또한 7.2%다.

시민들은 OTT가 발전하면서 인기 있는 영화들이 OTT를 중심으로 제작돼 극장을 찾을 요인이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이드리스 에스트사피 씨는 “넷플릭스에 흥미로운 콘텐츠가 더 많으니 사람들이 영화관에 가질 않는다”며 “실제로 볼만한 박스오피스 영화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몇 년간 봉쇄가 계속된 것도 전통 극장업계의 쇠락을 부추겼다. 르몽드에 따르면 2021년 프랑스의 극장 관객 수는 9550만 명으로 코로나19 확산 전인 2019년에 비해 55% 감소했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음식점을 하는 야신 타비 씨는 “코로나19 확산기 봉쇄로 거리에 유동 인구가 줄어든 데다 사람들이 넷플릭스 등 온라인으로 영상을 소비하는 방식이 굳어졌다”고 진단했다.

임대료 상승까지, 수익성 타격

높아진 임대료 또한 극장업계의 수익성 악화 요인으로 꼽힌다. 주요 지역의 임대료가 오르면서 이곳에서 오랜 기간 영업했던 상인들이 떠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영화업계에도 불어닥친 것이다.

특히 샹젤리제 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파리 중심부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약 2km의 직선도로로 이어진 거리엔 원래 100년 넘은 노포들이 많았다. 이제 이런 노포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그 자리를 명품 관련 매장이 채웠다.

이날 개선문에서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10분가량 걷는 동안 본 명품 매장만 10곳이 넘었다. 명품 브랜드들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이 거리를 차지하며 임대료를 끌어올렸다. 글로벌 부동산서비스업체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에 따르면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상업용 부동산의 1㎡당 연간 임대료는 2022년 기준 1만1069유로(약 1600만 원)에 달한다. 세계 주요 거리 중 5위에 해당하는 가격이다.

이 와중에도 제작되는 프랑스 영화는 늘고 있다. 프랑스 정부가 문화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여파로 풀이된다. 르몽드에 따르면 2021년 촬영된 영화는 340편을 넘었다. 신작 영화 또한 매주 12편 이상 개봉되고 있다.

다만 프랑스 영화의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다. 박스오피스 상위권은 대부분 미국 할리우드 영화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정보 제공 서비스 ‘알롱시네’의 쥘리앵 마르셀 총책임자는 르몽드에 “프랑스 영화산업은 온라인 티켓 판매, 디지털 마케팅 등에서 매우 뒤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고객 계정과 소비 데이터를 상세히 수집하고 분석해 인기 높은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