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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이슈/정양환]시칠리아를 찾아온 외국인 의사들

입력 | 2024-05-08 22:26:00

이탈리아 시칠리아주의 아름다운 소도시 체팔루. 영화 ‘시네마천국’ 촬영지로 유명하다. 인접 도시 무소멜리 등과 함께 의료 공백 및 지방소멸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 출처 LATCH 홈페이지

정양환 국제부 차장


에리카 모스카텔로 씨는 행복을 찾았다고 믿었다.

고향 아르헨티나의 삶은 곤궁했다. 정치는 둘째 치고 경제가 뒤숭숭했다. 지난해만 인플레이션이 211%. 1년 새 물가가 3배 넘게 뛰었단 소리다. 탈출을 꿈꾸던 그에게 달콤한 유혹이 찾아왔다. 모스카텔로 씨의 먼 이탈리아 친척이 남부 시칠리아주 무소멜리를 추천했다. 지방소멸 위기에 빠진 소도시는 외지인에게 빈집을 1유로(약 1460원)에 내주고 있었다.

고민 끝에 택한 이민은 만족스러웠다. 유럽 선진국다운 안정감이 좋았다. 할머니는 “뿌리를 찾아 귀향했다”며 반색했다. 이웃 주민은 정다웠고, 아이 학교도 맘에 들었다. 더 바랄 게 없어 보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2022년 갑작스레 아이가 아팠다. 치료가 시급했지만 동네에 ‘의사’가 없었다. 소아과는 모두 문을 닫아, 몇 시간을 운전해 대도시에서 진료받았다. 그때야 알았다. 소아과뿐이 아니었다. 산부인과도 없고, 하나 남은 외과도 곧 폐업할 참이었다. 이탈리아는 의사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예전만 못하다지만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한국 13위). 주요 7개국(G7) 멤버인 이탈리아에 뭔 일이 생긴 걸까. 영국 일간 가디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 민낯이 드러났던, 부실한 공공의료체계가 자아낸 비극”이라고 설명했다.

20세기만 해도 이탈리아 공공의료는 양적, 질적으로 우수하단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뒤 정부 재정적자가 심해지며 의료 투자가 줄어들었다. 지난해 관련 정부 지출은 GDP의 8.9%로 유럽연합(EU) 밑바닥 수준. 최근 5년 동안 주요 의료기관 800여 곳이 간판을 내렸다.

상황이 나빠지자 의료진의 엑소더스가 잇따랐다. 원래도 공무원급 처우가 불만이던 의사들은 높은 연봉을 안겨주는 다른 유럽 국가들로 떠나갔다. 후폭풍은 지방부터 몰아쳤다. 부유한 북부보다 남부가 심각했다. 특히 시칠리아 등 남부의 ‘의료 공백’은 지자체도 속수무책. 밀라노 국립의대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서 3만 명 넘게 의사가 부족하다.

“산소호흡기(oxygen respirator)를 단 의료 시스템”(유로TV)에 단비를 뿌려준 건, 다름 아닌 ‘외국인 노동자’였다. 코로나19 때 쿠바에서 파견한 의료진 도움이 컸던 이탈리아는 당시 인연을 계기로 쿠바 정부에 간청했다. 드디어 올해 1월부터 의사 약 500명이 한시적 계약을 맺고 남부로 오고 있다. 아바나 출신 오스벨 디아스 외과의(38)는 현지 매체에 “우린 돈이 아니라 인류의 연대(solidarity)를 위해 여기 왔다”고 했다.

또 다른 물꼬는 아르헨티나에서 트였다. 아르헨티나는 인구의 62.5%가 이탈리아계다. 낮은 임금과 미친 물가에 허덕이던 의사들에게 이탈리아는 선조의 나라이자 기회의 땅이었다. 지난해 말부터 의사 100여 명이 시칠리아로 넘어왔다. 이를 중개한 주축 중 한 명이 모스카텔로 씨. 그는 “부에노아이레스 지원자만 수천 명”이라며 “이들은 이탈리아를 구하는 영웅(superhero)이 될 것”이라 자신했다.

드라마라면 이쯤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련만…. 현실은 넘을 산이 쌔고 쌨다. 겨우 숨통만 트였을 뿐, 의사 수는 여전히 너무 모자라다. 더구나 쿠바 의료진은 몇 년 뒤엔 돌아간다. 현 정권이 반(反)이민 정책으로 기울고 있는 대목도 불안하다. 가디언은 “아르헨티나 의사들의 면허가 만료되는 2028년 전후에도 쉽사리 갱신해줄지 미지수”라고 짚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의사들이 그랬듯, 앞으론 더 조건 좋은 타국으로 갈 수 있다.

시칠리아의 의료 현실은 자명한 이치를 일깨운다. 이탈리아 라이라디오1은 “공들여 쌓은 의료체계라도 자칫 금이 가면 속절없이 무너진다”며 “더 큰 문제는 재건이 수십 배는 힘들다는 점”이라고 한탄했다. 이게 남의 나라라고 불구경해도 되는 걸까. 엉덩이 타는 냄새가 물씬 풍겨 온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