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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전각 헐고 전시관 지어… 경성 박람회 100만명 다녀가[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입력 | 2024-05-08 22:37:00

식민통치 5주년 ‘발전상 과시’ 의도… 아관파천후 빈 경복궁을 장소로 선택
궁궐의 전각 대거 공매하거나 철거… 벼-면화 등 일본산 품목 50일 전시
총독부, 지방-학교에 단체관람 지시… 방문객들에 도로 정비 성과도 과시



1915년 일제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해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장 전경(위쪽 사진). 위쪽에 광화문(점선 안)과 세종로가 보인다. 일제는 장소를 마련하려 경복궁의 전각을 다수 공매하거나 철거했다. 당시 조감도를 통해 경복궁이 얼마나 훼손당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DB·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1915년 일제가 연 ‘공진회’ 행사



경성의 도시 개발, 정비사업인 ‘시구개정’ 사업은 192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지만, 공사의 진척 속도가 두드러진 시기는 1910년대 전반의 몇 년간이다. 정확하게는 1915년 여름까지이다. ‘매일신보’ 1915년 8월 12일자 기사는 도로 공사가 한창인 풍경을 이렇게 전한다. “2, 3개월 전부터 착수한 남대문통 시구개정 공사는 조선은행 앞으로부터 종로 십자가까지 대로인데 공진회(共進會) 절박(切迫)한 금일에 황금정으로부터 종로까지 그 사이는 완연히 전장이나 다름없는 소동이라. 좌우를 살피면 가로에는 돌덩이가 산재하고 석공은 돌을 자르며 대목은 재목을 깎고 연와(煉瓦; 벽돌)는 산같이 적치하고 전차궤도가 횡재(橫在)하여 그 혼잡한 상황은 형상하기 어려운데, 인차의 왕래가 번잡함으로 공사의 진척상 방해가 적지 않으나 공진회가 절박했으므로 금일은 주야겸행(晝夜兼行)의 상황으로…”》





안 그래도 왕래가 복잡한 시내 한복판에 전차까지 다니는데, 한편에 자재를 쌓아 두고 기술자와 인부들은 밤낮없이 일하고 있다. 이렇게 “전장이나 다름없는 소동”을 벌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9월 개최 예정인 ‘공진회’가 한 달여 앞으로 닥쳤기(절박) 때문이다.

공진회란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를 뜻한다.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한 행사이다. 1914년에 접어들면서 이듬해 어떤 기념행사를 할 것인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고위급 친일파나 민간 일본인 유력자들이었다. 이들은 1910년 이래 5년간 일제 통치 아래에서 조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박람회를 개최하자고 주장했다. 총독부는 아직 조선의 발전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루 볼만한(박람) 것이 적으므로 앞으로 발전을 기약하는 의미에서 함께 나아가자는 뜻의 ‘공진회’가 적당한 명칭이라고 보았다.

공진회 장소는 경복궁으로 결정했다. 경복궁은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아관파천) 비어 있었다. 총독부는 위치나 주변 경관, 규모 등 모든 점에서 경복궁이 적당하다고 보았다. 일제가 볼 때 경복궁은 중심가에 있으면서 특별한 용도가 없이 비어 있는 넓은 공간으로 큰 행사를 치르기에 알맞은 장소였던 셈이다. 그러나 실무적 이유만으로 공진회 같은 중요한 행사의 장소를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조선왕조 법궁이었던 경복궁의 장소성을 의식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총독부는 경복궁 경내 12만7000여 평 중 약 7만3000평을 공진회장 부지로 설정했다. 처음에는 근정전 동쪽 부지를 주로 이용할 구상이었으나 공진회 계획이 점점 확대되면서 회장 부지도 근정전을 둘러싼 더 넓은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총독부는 1914년 7월 공진회장 부지로 설정한 영역의 전각 15동을 공매했다. 공매된 전각은 일본 불교 사찰이나 부호의 저택, 심지어 요정에 팔리기도 했다. 그 후에도 행사 준비를 구체화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궁궐의 전각을 공매하거나 철거했다.

전각을 없앤 자리에는 공진회 전시관으로 사용할 가건물을 여러 채 지었다. 주전시관인 1호관, 2호관, 심세관(審勢館·조선 13도의 실태 전시), 동양척식회사 특설관, 철도관, 미술관 등 합계 6000여 평 규모였다. 주전시관인 1호관은 궁궐의 중앙,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약 1500평 규모로 지었다. 1호관에는 주로 벼, 보리, 면화, 잠사(蠶絲), 광산물 등 병합 이후 일제가 들여오거나 개발한 생산물의 표본이나 일본인 이민자 수, 일본인 경영 대농장의 성적 등을 보여주는 통계를 그래프로 그려서 전시했다. 단지 새로운 것을 전시하는 게 아니라 ‘비교’를 했다. 예컨대 조선의 재래종 벼와 일본 품종인 조신력(早神力·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벼 품종)의 생산성 차이를 보여주는 식이었다.

1915년 9월 11일 공진회 개막일 광화문에 운집한 관람객들. 일제가 식민통치를 과시하기 위해 연 이 행사에 50일간 100만 명이 다녀간 것으로 추산된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공진회 기간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로 정했다. 최대한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고자 총독부는 홍보와 관람객 동원에 열을 올렸다. 각 군에 지시하여 군수 책임하에 관람단을 조직하게 하고 각급 학교에도 학생 관람단 조직을 지시했다. 조선에 주재하는 외국인에게는 일일이 영문 안내장을 발송했다. 안국선(安國善)이 총독부의 의뢰로 소설집 ‘공진회’를 발간한 것도 이런 홍보의 일환이었다. 신소설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1908년)의 작가로 알려진 안국선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병합 후 경상북도 청도군수를 지냈다. “문명이니 개화니 발달 진보니 하는 여러 가지 말이 지금 세상에 행용(行用)하는 의례의 말이라. 조선도 여러 해 동안을 문명 진보에 열심 주의하여 모든 사물의 발달되어가는 품이 날마다 다르고 달마다 다르도다. 이번 공진회를 구경한 사람은 누구든지 조선의 문명 진보가 오륙년 전에 비교하면 대단히 발달되었다고 할 터이라”는 구절은 ‘공진회’를 집필한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공진회 관람객이 정확하게 몇 명이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50일간 대략 연인원 100만 명 이상(조선인 약 73만, 일본인 30만)이 입장했다고 추산한다. 당시 조선 전체 인구가 1700만이 못되었으니 지방에서 경성까지 오는 교통편 등을 감안하면 대단한 인원인 셈이다. 총독부는 여러 경로로 관람단을 조직하게 했을 뿐 아니라 공진회가 끝난 후에는 감상문을 작성하도록 각 지방에 지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두 달이 채 못 되는 공진회 기간 중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이 경성을 방문했다. 따라서 이들의 눈앞에는 총독부가 지난 5년 동안 경성의 시가지를 정비한 ‘성과’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1915년 가을을 목표로 “주야겸행” “전장이나 다름없는 소동”으로 시구개정 사업을 추진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공사 기록을 보면 시구개정 사업의 핵심 도로들(을지로, 태평로, 남대문로, 돈화문로, 창경궁로 등)은 거의 1915년까지 준공했다.

공진회가 끝난 1년 반 뒤인 1917년 2월 ‘신문계(新文界)’에 발표된 ‘경성유람기’라는 소설도 시구개정에서 총독부가 과시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신문계는 다케우치(竹內錄之助)라는 사람이 발간한 잡지이다. 다케우치는 1910년대 조선에서 신문계, ‘반도시론’ 등의 잡지와 여러 책을 펴낸 언론인 겸 출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른 자로 알려져 있는데, 신문계의 지면도 총독부의 정책을 선전하거나 식민지화 이후 조선의 ‘발전’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경성유람기는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갑오 때”(1894년) 함경도로 낙향한 이승지라는 사람이 20여 년 만에 경성 구경을 온다는 설정이다. 이승지가 막 경성에 도착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기차가 동대문에 도착하니 좌우 성벽을 헐어 광활한 도로를 개통하고 마차, 자동차, 인력거가 복잡하게 왕래하는 광경은 이승지 고루한 안목에 실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인데, “이승지는 감탄함을 마지아니하며 경성 사람의 의관 물건이며 시가 좌우의 상점 간판을 낱낱이 유의하여 보며 남대문통 가로로 들어서서 도로 교량의 완전히 개량함을 탄복”한다. 이승지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맞닥뜨리는 것이 “광활한 도로”, “도로 교량의 완전히 개량”이다. 그리하여 이승지로 대표되는 “고루한 안목”의 조선인이 “감탄함을 마지아니”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총독부가 시구개정 사업을 추진한 진정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