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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尹 대통령, 바꿔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혼동해선 안 된다

입력 | 2024-05-09 23:21:00

국민이 尹에 요구한 변화는 脫오만과
부인 문제 공정성 회복하라는 것이지
野에 굽히고 인사권 넘기라는 게 아냐
좌파 잘못 분명히 맞서 국정방향 지켜야




이기홍 대기자

윤석열 대통령에게 국민이 요구하는 변화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더 이상 오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만이라는 그 뿌리에서 2년간 숱한 썩은 가지들이 뻗어났다.

‘내 부인은 예외’라는 오만이 여사 문제를 산사태로 키웠고, ‘여당은 대통령 직속 부대여야 한다’는 오만이 당 대표를 쫒아내고 전당대회 룰을 바꾸는 꼼수정치로 이어져 당을 풍비박산 냈다. ‘당신이 뭘 알어’라는 오만이 주변의 언로를 막았고, ‘당신들이 검사보다 똑똑해?’라는 오만이 편중인사, 검찰공화국 프레임을 키웠다.

총선 참패 한달. 대통령은 ‘겸손한 윤석열’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가. 고개를 흔들 사람이 많을 것이다. 21개월 만의 기자회견에서도 근본적 변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윤 대통령에겐 두 번의 거듭날 기회가 있었다. 강서 보선 참패 직후와 연초 KBS와의 대담이었는데 다 놓쳤다.

특히 KBS대담에서 핸드백 문제에 대해 “정말로 죄송하다. 절대로 그런 일 없도록 하겠다”며 진솔하게 사과하지 않고 “아쉽다”며 눙치고 넘어감으로써 국민 마음 속에 “그래? 두고 보자”는 응어리를 맺게 해 총선 참패로 귀결됐다. 문제는 핸드백 자체가 아니라 그걸 풀어가는 자세였는데 몰랐던 것이다.

이번 회견에서도 부인 문제에서 태도의 대전환을 이뤄 공정과 상식의 솔선수범자로 돌아가려는 진심을 느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꼼수정치, 비선정치에서 벗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온다.

윤 대통령은 총선 직후 홍준표 대구시장뿐만 아니라 오세훈 서울시장, 나경원 당선인 등도 따로따로 불러 만났다고 한다.

기존에 윤 대통령은 온 나라가 엑스포 유치에 올인하는데 오 시장은 대통령실과 협의 없이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겠다며 따로 뛰어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오 시장이 지난해 초 한남동 새 시장 공관에 입주한 뒤 대통령을 초대했으나 윤 대통령은 대통령 관저로 오라고 했고 여기에 권영세 의원 등 다른 사람들도 불러 독대 자리를 자연스레 무산시켰다고 한다. 나경원 당선인과도 전당대회 때 핍박했던 역사가 있다.

오 시장, 나 당선인과의 면담 이후 나 당선인이 당 대표로 오 시장의 대권 도전을 지원하고 오 시장은 나 당선인의 차기 서울시장 도전을 돕는다는 동맹 구축설이 여권 내에서 돌고 있다.

문제는 윤 대통령에게 절실한 정치의 복원은 이런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재명 대표와의 회동에 함성득 임혁백 라인이 일정 부분 관여했다는 것도 대통령이 비공식라인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야당 대표와의 회담은 당연히 여당 지도부를 통해 이뤄져야 마땅하다. 박영선 총리설 파동에 이어 비선라인 의혹이 또 일게 된 것이다.

게다가 총선에 나갔던 이원모 비서관을 복귀시킨다는데, 그가 아무리 유능해도 부인이 김건희 여사의 유럽 순방에 동행한 사실이 온 나라에 각인된 인물의 회전문 등용이 국민에게 어떻게 비치겠는가. 국민이 총선에서 버리라고 요구한 ‘작은 정치’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총선민심은 대통령의 환골탈태를 요구했고, 윤 대통령도 여러 변화 시도를 한다. 그런데 실제로 바뀌어야 할 ‘작은 정치’, 부인 감싸기는 큰 변화의 기미가 없는데 정작 엉뚱한 데서 변화의 조짐들이 보인다.

한 예로 육사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백지화하려 한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로서의 홍 장군을 높이 기리고 추모’하는 것과, ‘독립군이 몰살 당한 자유시 참변 관련 의혹과 소련공산당 경력 등이 육사 생도의 전범(典範)으로 삼기에는 적절치 않으니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해 모시자’는 주장은 배치되는 게 아니다. 민간·학계에서 문제제기와 충분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은채 문제제기 방식이 관 주도로 된 것은 아쉽지만, 문재인 정권이 육사의 정체성을 바꾸려는 의도로 벌인 일을 바로잡겠다는 취지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닌데도 총선에서 지니까 발을 빼려는 것은 뚜렷한 철학과 역사관이 있는지를 의심케 한다.

야당이 요구하는 국정기조전환을 국정방향과 국정태도로 구분해 보자. 연금개혁 노동개혁 원전정책 가치동맹외교 등 국정방향은 전환 대상이 아니다. 전환해야 하는 것은 정책 변화를 이끌어가는 윤 대통령의 소통방식 등 태도일 뿐이다.

국정방향을 전환하라면 문재인 때처럼 낡은 좌파이론 실험장으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공중파를 진영의 도구로 삼아 극단으로 치닫는 좌파 방송의 횡포를 방치하자는 말인가. 좌편향된 균형추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너무 당겨 우편향을 범하는 우(愚)는 철저히 경계해야 하지만 방향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철학 소신은 확고해야 한다.

대다수 국민은 이재명 대표와 야당이 잘해서 찍어준 게 아니다. “야당도 형편없지만 윤 대통령 당신이 더 잘못하고 있다”며 등을 돌린 것이다. 야당과 좌파의 잘못을 덮어주라는 게 총선민의가 아니다. 야당 편들고 총리 인사권 등 권한 다 넘겨주라는 게 아니라 대통령 당신이 바뀌라고 회초리를 내리친 것이다

대선 때 윤 후보에게 표를 주며 국민이 맡긴 소명도 더 이상 미루면 안 된다. 대표적인 게 문재인 전 대통령 문제다. 가족 관련 의혹들, 울산시장 선거 개입, 해수부 공무원 피살 사건, 대(對) 중국 3불1한의 전말, 남북정상 USB의 실체 등등의 진실을 밝혀야 정의가 복원된다. 정치보복이 아니라 유권자에 대한 책무다.

중도는 이념 때문에 떠난 게 아니다. 대통령이 공정과 상식이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떠난 것이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지적과 경고를 무시하다 총선을 그르쳤음에도 진솔한 반성과 뼈저린 현실인식이 없다면, 다음 대선은 물론이고 장기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수에 상처를 입힌 정치인으로 기록될 수 있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