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도영 산업1부 기자
지난해 12월 한중 대표 기업인들이 4년 만에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만났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 겸 SK그룹 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박승희 삼성전자 사장 등 주요 기업인들이 중국 대표 석유화학, 바이오, 에너지그룹 회장들과 공식 석상에 마주 앉았다. 마음 편한 자리를 가질 수 있었던 데는 따로 이유가 있다.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 임채민 전 복지부 장관, 최석영 전 외교부 자유무역협정(FTA) 교섭대표 등 전직 정부 관계자들이 함께하면서 ‘한중 기업인 및 전직 정부 고위인사 대화’라는 ‘버퍼(완충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미중 갈등의 파고가 닥치기 전 중국에 시장과 생산기지를 동시에 두고 있는 한국 기업인들은 중국 파트너들과 수시로 만나며 협력했다. 중국 특성상 파트너사뿐만 아니라 중앙 당국 및 지방 정부 관계자들과의 네트워크에도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하지만 2018년 미국의 대중 제재 방침 이후 기류가 급변했다. 기업 거래가 흔들려도, 생산기지에 문제가 생겨도 중국행(行)이 쉽지 않은 분위기가 됐다. 간다 해도 철저히 소규모로 비밀에 부쳐야 했다.
4년 만에 열린 지난번 한중 기업인 대화에서 가장 밀도가 높았던 시간은 방한한 중국 기업 파트너들과 밤늦게까지 이어졌던 술자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랜만에 허심탄회하게 마주 앉은 양국 기업인들은 사업 골칫거리와 투자 논의 건들을 하나씩 풀어내며 모처럼 숨통을 틔웠다.
한국 기업들이 소리 없이 피해를 입는 사이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모인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지난해 7월 미 행정부의 중국 제재 방침에 대해 “반도체 업계는 계속해서 중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며 당당하게 공동 성명을 냈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중국 매출이 급전직하하자 올 3월 중국을 찾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다. 상하이 애플스토어 개장식에 가서 직접 문을 여는 장면까지 연출했다.
수십 년 공들인 시장이 서서히 닫히는 걸 눈 뜨고 보면서도 미국 기업들보다 더 미국과 중국 정부 눈치를 봐야 하는 한국 기업들은 정부가 외교적인 물꼬를 터주길 고대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달 말로 조율 중인 한중일 정상회의에 대한 재계의 기대감은 크다. 특히 3국 경제통상장관회의가 2019년 12월 이후 4년여 만에 열리는 만큼 한국 정부가 국가 경제 실익을 위한 ‘프레너미(frenemy·친구와 적의 합성어로 경쟁적인 우호 관계를 의미)’ 전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부가 공격수의 입장에 서 있더라도 기업들의 비즈니스 뒷길은 열어 두는 미국처럼 이번 회담으로 한국 기업들에 최소한의 숨통이 틔워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곽도영 산업1부 기자 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