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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40년간 이어진 헤리티지… 공익 캠페인의 역사를 쓰다

입력 | 2024-05-13 03:00:00

40년간 5700만 그루 나무 심고 가꾼
유한킴벌리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제도적 기업가정신’으로 제도 혁신
이해관계자 협력으로 인식 전환 견인




유한킴벌리가 1985년 처음 나무를 심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위쪽 사진)의 한 민둥산은 현재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아래쪽 사진). 이곳에는 잣나무 총 1만2000그루가 뿌리를 내렸으며 산림 소유주나 임업 전문회사가 아닌 민간 기업이 국공유지에 숲을 조성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다. 유한킴벌리 제공

강원 동해시 초구동의 봉화대산. 2022년 3월 강원 강릉시 옥계면에서 발생한 산불의 상흔으로 곳곳이 검게 그을린 이 산에 올 3월 31일, 젊은 부부 120쌍이 모여 나무를 심었다. 이날 심은 나무는 총 2000여 그루. 신혼부부들은 이곳 강원도뿐만이 아니라 1985년부터 2023년까지 경기, 대전 등 국내 32개 지역의 민둥산을 찾아 매년 나무를 심어 왔다. 우리 산을 푸르게 만들기 위해 이들을 이끈 주체는 정부도 시민단체도 아닌 민간 기업이었다. 주인공은 바로 생활용품 제조사 유한킴벌리다.

1985년 첫 나무 심기를 시작으로 유한킴벌리가 지속해온 캠페인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가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유한킴벌리는 지금까지 총 5700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고 가꾸고, 숲의 가치를 알리는 공익광고 캠페인과 학교와 도시에 숲을 조성하는 ‘학교숲’ ‘도시숲’ 운동을 전개하는 등 ‘숲’을 매개로 다양한 사회 문제를 해결해 왔다. 세 번의 대표이사 사장 교체에도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이 명맥을 유지하며 국내 대표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활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DBR(동아비즈니스리뷰) 2024년 5월 1호(392호)에 실린 유한킴벌리의 국내 최장수 숲·환경 공익 캠페인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의 성공 요인을 요약 소개한다.

● 이해관계자 요구 창출한 ‘제도적 기업가정신’

유한킴벌리의 행보는 기존 ESG 경영의 문법으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40년의 여정에서 관찰되는 흥미로운 패턴은 이 캠페인이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인식 변화를 선제적으로 이끌고 결과적으로 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캠페인의 주요 활동에는 나무 심기뿐만 아니라 때론 기존의 나무를 베어야만 하는 숲 가꾸기가 포함됐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숲을 가꾸기 위해 일부 나무를 베어야 한다는 인식은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유한킴벌리가 1985년부터 시작한 숲 가꾸기 활동은 공익광고, 신혼부부 나무심기 운동 등을 통해 조금씩 대중 인식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부 나무를 베고 숲을 가꿈으로써 숲이 더 건강해진다는 사회적 인식을 형성시킨 것이다. 산림청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숲 가꾸기 필요성에 대한 국민 인식은 2010년 23%, 2023년 약 83%로 가파르게 높아졌다. 유한킴벌리의 캠페인이 이해관계자의 요구를 도리어 창출해낸 셈이다.

조직학에서는 기업의 이런 활동을 제도적 기업가정신(Institutional Entrepreneurship)으로 개념화한다. 줄리 바틸라나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와 연구진에 따르면 기업가가 새로운 기업을 만드는 것처럼 제도 혁신가(Institutional Entrepreneur)는 기존의 제도적 환경에 존재하는 자원들을 활용해 새로운 제도를 만들거나 기존의 제도적 환경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킨다. 앞서 설명했듯 유한킴벌리의 제도적 기업가정신은 숲 가꾸기를 생소한 활동에서 마땅히 해야 할 환경보전 활동의 일환으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이는 공식적인 제도 변화로 이어졌다. 일례로 유한킴벌리가 주도한 학교와 도시에 숲을 조성하는 ‘학교숲’ ‘도시숲’ 운동은 2020년 ‘도시숲 등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과 같은 도시숲 관련 제도를 체계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는 제도적 환경 제약에 순응하기보다 주도적으로 제도 환경을 바꿔가는 제도적 기업가정신이 유한킴벌리의 조직 유전자(DNA)에 각인돼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 이해관계자 협력으로 인식 변화 견인

유한킴벌리가 캠페인을 통해 보여준 제도 혁신의 또 다른 특징은 정부, 시민·환경단체, 학교, 도시 등 다양한 영역의 이해관계자와 협력해 제도 변화를 견인했다는 점이다. 산티 푸나리 영국 런던시티대 베이즈경영대학원 교수는 기업, 정부, 민간 등 다양한 영역이 중첩되는 공간(Interstitial Space)에서 제도적 혁신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기업가, 정부 정책 담당자, 비영리조직 운동가 등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행위자들이 만나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협력할 때 기존 제도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활동이 일어난다는 설명이다.

유한킴벌리가 보여준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협력은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된 ‘생명의 숲 국민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유한킴벌리는 외환위기 시기에 대거 발생한 실업자를 숲 가꾸기 공공근로사업을 통해 재고용하는 운동의 구심점이 되면서 산림청, 환경단체, 환경 전문가, 그리고 기업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중간 공간을 조성했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생겨난 다양한 아이디어가 기존 환경 관련 제도의 틀을 깨기 시작했다. 일례로 학교숲 조성 운동은 사업 초기에 학생들의 체육 공간을 줄인다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숲이 학생들의 정서 안정과 학업 환경에 도움을 준다는 점이 알려지고, 학교 주변 시민들도 숲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정당성을 얻었다. 김선태 미국 존스홉킨스대 케리경영대학원 교수는 “유한킴벌리는 기업과 이해관계자의 가치를 동시에 창출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며 “지난 40년간 지속해온 숲 가꾸기 운동이 이제 보편적인 사회 활동으로 자리 잡은 만큼 이제 다시 한번 인식 전환과 제도 혁신을 선도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최호진 기자 ho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