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과 양안관계의 경제학 中-대만, 패권 놓고 내전 치렀지만… 방문-이민 등 사람 간 왕래는 활발 中, 대만의 해외직접투자 대상 1위… 대만은 中 전체 무역액의 5% 차지 지난 70년간 대만 실효지배 못한 中… “독립은 죽음의 길” 흡수 포기 안해
중국과 대만은 대륙 패권을 놓고 1927∼1950년 ‘국공 내전’을 치렀다. 휴전 협정을 맺지 않아 긴장 관계는 계속되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 병사가 2022년 8월 대만 주변 군사훈련 중 망원경으로 대만 해안선 쪽을 보고 있다. 앞에 보이는 선박은 대만 호위함 란양이다. 신화 뉴시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중국과 대만은 원칙적으로 전쟁 상태다. 과거의 내전이 안 끝났기 때문이다. 중국과 대만의 법적 관계는 실로 골치 아프다. 중국은 ‘일국양제’라는 표현을 쓴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하나뿐이고 다만 두 개의 체제가 잠시 있을 뿐이라는 식이다. 대만에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20세기에 대륙에서 건너온 이들은 대체로 ‘일국양부’를 주장한다. 중국은 하나지만 두 개의 정부가 협의해야 한다는 쪽이다. 반면 20세기 이전에 자리 잡은 이들 중 다수는 대만은 중국과 별개라고 믿는다.
국공 내전 때 대만 중화민국군이 운용한 M5A1 스튜어트 전차. 중국 인민해방군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중국은 대만의 독립이라는 개념에 치를 떤다. 기본적으로 독립이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금기어다. 분리 독립의 움직임이 있는 티베트, 신장위구르, 네이멍구 때문이다. 그래도 국제 사회는 어쨌든 그곳들을 중국의 영토로 인정한다. 대만은 사정이 다르다. 대만과 정식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도 있고 또 지난 70여 년 동안 실효적으로 중국은 대만을 지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대만의 흡수를 포기하지 않는다. 일례로 올 1월 14일 중국 외교부장 왕이는 “죽음의 길”이라며 대만 독립에 분노를 표했다.
대만의 흡수가 경제 관점에서 중국에 꼭 필요한 일일까? 생산의 3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대만의 영토는 중국의 0.4%고 인구는 1.7%다. 그렇게 크다고 볼 숫자는 아니다. 또 대만의 국내총생산은 중국의 4%다. 이는 중국에 강제로 흡수되면 스러지기 십상이다. 즉, 강제 흡수는 황금알을 낳던 거위의 배를 가르는 꼴이 되기 쉽다.
좀 더 이유를 찾으면 경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념이 하나 나온다. 이름하여 ‘스파치오 비탈레’다. 이탈리아어인 스파치오와 비탈레는 각각 영어의 스페이스와 바이탈이다. 스파치오 비탈레는 ‘생존에 필수적인 공간’이다.
보타이에게 스파치오 비탈레란 곧 이탈리아 생존에 필수적인 영토를 의미했다. 그건 이미 이탈리아가 가지고 있던 영토만을 뜻하진 않았다. 프랑스 남부, 발칸반도의 대부분, 아프리카의 약 3분의 1, 그리고 아라비아반도 전체가 스파치오 비탈레에 포함되었다. 보타이는 이러한 영토 확장을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에 비견했다. 1930년 ‘파시스트 경제’라는 책을 쓴 보타이는 이탈리아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의 중요한 동지였다.
스파치오 비탈레는 다른 나라에도 영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포병 여단을 지휘한 카를 하우스호퍼는 원래 유명 경제학 교수의 아들이었다. 갑작스러운 패전 후 1919년 소장으로 예편한 하우스호퍼는 뮌헨대의 교수가 되어 독일의 생존 공간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우스호퍼는 원래 식물의 서식지를 뜻하던 독일어 단어에 보타이식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 단어가 바로 ‘레벤스라움’이다.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은 단지 상아탑의 고준담론이 아니었다. 1차대전 중 포병 부대 사병으로 입대해 보병 소대장을 거쳐 나중에는 포커 복엽전투기 조종사로 종전을 맞이한 루돌프 헤스는 1919년 뮌헨대에 경제학과 역사학 전공으로 입학했다. 곧바로 하우스호퍼의 애제자가 된 헤스는 나중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즉 나치당의 2인자가 되었다. 1923년 뮌헨 폭동의 실패 후 감옥에 갇힌 헤스와 이른바 “오스트리아인 상병(아돌프 히틀러)”을 면회해 레벤스라움을 직접 가르친 사람이 바로 하우스호퍼였다.
하우스호퍼의 영향력은 다른 데서도 발휘되었다. 1909년 주일 독일대사관의 무관으로 도쿄에 배치된 하우스호퍼는 1913년 뮌헨대에서 일본의 군사력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가 인정하는 독일 내 최고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하우스호퍼가 일본을 추축국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었다. ‘영미귀축’, 즉 영국과 미국이라는 아귀와 짐승을 몰아내자는 ‘대동아공영권’은 하우스호퍼가 전수한 일본판 레벤스라움이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