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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이 합치려는 대만… 영토는 대륙의 0.4% ‘콩알’, GDP는 4% ‘황금알’[권오상의 전쟁으로 읽는 경제]

입력 | 2024-05-12 23:15:00

내전과 양안관계의 경제학
中-대만, 패권 놓고 내전 치렀지만… 방문-이민 등 사람 간 왕래는 활발
中, 대만의 해외직접투자 대상 1위… 대만은 中 전체 무역액의 5% 차지
지난 70년간 대만 실효지배 못한 中… “독립은 죽음의 길” 흡수 포기 안해




중국과 대만은 대륙 패권을 놓고 1927∼1950년 ‘국공 내전’을 치렀다. 휴전 협정을 맺지 않아 긴장 관계는 계속되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 병사가 2022년 8월 대만 주변 군사훈련 중 망원경으로 대만 해안선 쪽을 보고 있다. 앞에 보이는 선박은 대만 호위함 란양이다. 신화 뉴시스

《5월 3일 중국의 군용기 14대가 대만 본섬의 76km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대만 국방부는 발표했다. 그 이전인 3월 22일에는 중국 국방부가 “미국이 불장난을 하고 있다”며 강하게 경고했다. 미 육군의 2급 특수부대인 일명 그린베레가 진먼다오와 펑후 제도, 즉 대만 해협의 금문도와 팽호 제도에 배치된 것에 반발하는 모양이었다. 중국에 대만은 ‘중화’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다. 중국의 국가 명칭이 괜히 중화인민공화국인 게 아니다. 중화는 한족이 스스로 칭하는 말이다. ‘세상 중심의 빛나는 존재’인 중화는 이웃의 타 민족을 자신보다 열등한 오랑캐로 인식함으로써 성립하는 개념이다. 사실 대만이 한족과 엮이게 된 건 별로 역사가 깊지 않다. 대만의 원주민은 말레이계로 한족에게는 그저 남쪽의 오랑캐였다. 한족의 국가 송이 1171년 펑후 제도를 점령했지만 대만 본섬은 아니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몽골인의 나라 원은 1281년 순검사를 펑후에 설치했으나 한족의 국가 명은 1384년 오히려 이를 폐지했다. 그러니까 1662년 명의 잔당이 본섬을 점령했던 게 대만이 중화에 지배된 최초의 사례다. 그마저도 21년 만에 만주족의 나라 청에 빼앗겼다. 1912년에 세워진 중화민국은 한족이 만주족의 청을 몰아내고 만든 국가였다. 1895년 대만인은 대만민주국의 독립을 선포했지만 일본에 짓밟혔다.

중국과 대만은 원칙적으로 전쟁 상태다. 과거의 내전이 안 끝났기 때문이다. 중국과 대만의 법적 관계는 실로 골치 아프다. 중국은 ‘일국양제’라는 표현을 쓴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하나뿐이고 다만 두 개의 체제가 잠시 있을 뿐이라는 식이다. 대만에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20세기에 대륙에서 건너온 이들은 대체로 ‘일국양부’를 주장한다. 중국은 하나지만 두 개의 정부가 협의해야 한다는 쪽이다. 반면 20세기 이전에 자리 잡은 이들 중 다수는 대만은 중국과 별개라고 믿는다.

국공 내전 때 대만 중화민국군이 운용한 M5A1 스튜어트 전차. 중국 인민해방군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과거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놓고 내전을 치렀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194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과 함께 카이로 선언을 발표할 정도로 일본 상대의 전쟁에서 역할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개된 내전에서 진 국민당은 1949년 대만으로 정부를 옮겼다. 그 후 1970년대 후반까지 금문도를 두고 날마다 포탄을 날린 중국과 대만은 한국과 달리 공식적인 휴전 협정도 맺은 적이 없다.

물론 현재 총탄이 오고 가는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왕래하는 건 사람이다. 일시적인 방문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로 간에 이민도 가능하다. 대만 신혼부부의 약 10%가 대만 남자와 중국 여자의 결혼이라는 통계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일례로 ‘대만의 국민 첫사랑’ 천옌시는 2014년판 무협 드라마 ‘신조협려’에 같이 출연한 중국 배우 천샤오와 부부가 되었다.

경제만 놓고 보면 중국과 대만의 관계는 밀접하다. 대만에 중국은 해외 직접 투자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다. 가령 1991년부터 2022년까지 대만이 중국에 투자한 금액은 모두 2000억 달러가 넘는다. 또한 대만의 전체 수출 중 35%가 중국과 홍콩으로 향한다. 대만 무역액의 21%를 차지하는 중국은 대만의 가장 큰 교역 상대다. 중국 역시 경제의 파트너로서 대만을 무시할 수 없다. 중국 세관의 2022년 자료에 따르면 대만은 미국, 한국, 일본의 뒤를 잇는 네 번째로 큰 교역 상대다. 대만과의 무역 비중은 중국 무역액 전체의 5%에 달한다.

중국은 대만의 독립이라는 개념에 치를 떤다. 기본적으로 독립이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금기어다. 분리 독립의 움직임이 있는 티베트, 신장위구르, 네이멍구 때문이다. 그래도 국제 사회는 어쨌든 그곳들을 중국의 영토로 인정한다. 대만은 사정이 다르다. 대만과 정식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도 있고 또 지난 70여 년 동안 실효적으로 중국은 대만을 지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대만의 흡수를 포기하지 않는다. 일례로 올 1월 14일 중국 외교부장 왕이는 “죽음의 길”이라며 대만 독립에 분노를 표했다.

대만의 흡수가 경제 관점에서 중국에 꼭 필요한 일일까? 생산의 3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대만의 영토는 중국의 0.4%고 인구는 1.7%다. 그렇게 크다고 볼 숫자는 아니다. 또 대만의 국내총생산은 중국의 4%다. 이는 중국에 강제로 흡수되면 스러지기 십상이다. 즉, 강제 흡수는 황금알을 낳던 거위의 배를 가르는 꼴이 되기 쉽다.

좀 더 이유를 찾으면 경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념이 하나 나온다. 이름하여 ‘스파치오 비탈레’다. 이탈리아어인 스파치오와 비탈레는 각각 영어의 스페이스와 바이탈이다. 스파치오 비탈레는 ‘생존에 필수적인 공간’이다.

스파치오 비탈레를 제안한 사람은 1895년 로마에서 태어난 주세페 보타이다. 1915년 이탈리아가 원래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침공하자 대학을 다니던 보타이는 학업을 중단하고 이탈리아군에 자원입대했다. 또 1936년 보타이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소령으로 참전하려고 로마 시장을 사임했다. 보타이는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이탈리아의 경제를 책임지는 기업장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보타이에게 스파치오 비탈레란 곧 이탈리아 생존에 필수적인 영토를 의미했다. 그건 이미 이탈리아가 가지고 있던 영토만을 뜻하진 않았다. 프랑스 남부, 발칸반도의 대부분, 아프리카의 약 3분의 1, 그리고 아라비아반도 전체가 스파치오 비탈레에 포함되었다. 보타이는 이러한 영토 확장을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에 비견했다. 1930년 ‘파시스트 경제’라는 책을 쓴 보타이는 이탈리아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의 중요한 동지였다.

스파치오 비탈레는 다른 나라에도 영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포병 여단을 지휘한 카를 하우스호퍼는 원래 유명 경제학 교수의 아들이었다. 갑작스러운 패전 후 1919년 소장으로 예편한 하우스호퍼는 뮌헨대의 교수가 되어 독일의 생존 공간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우스호퍼는 원래 식물의 서식지를 뜻하던 독일어 단어에 보타이식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 단어가 바로 ‘레벤스라움’이다.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은 단지 상아탑의 고준담론이 아니었다. 1차대전 중 포병 부대 사병으로 입대해 보병 소대장을 거쳐 나중에는 포커 복엽전투기 조종사로 종전을 맞이한 루돌프 헤스는 1919년 뮌헨대에 경제학과 역사학 전공으로 입학했다. 곧바로 하우스호퍼의 애제자가 된 헤스는 나중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즉 나치당의 2인자가 되었다. 1923년 뮌헨 폭동의 실패 후 감옥에 갇힌 헤스와 이른바 “오스트리아인 상병(아돌프 히틀러)”을 면회해 레벤스라움을 직접 가르친 사람이 바로 하우스호퍼였다.

하우스호퍼의 영향력은 다른 데서도 발휘되었다. 1909년 주일 독일대사관의 무관으로 도쿄에 배치된 하우스호퍼는 1913년 뮌헨대에서 일본의 군사력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가 인정하는 독일 내 최고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하우스호퍼가 일본을 추축국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었다. ‘영미귀축’, 즉 영국과 미국이라는 아귀와 짐승을 몰아내자는 ‘대동아공영권’은 하우스호퍼가 전수한 일본판 레벤스라움이었다.

아마도 중국은 중국과 대만의 이른바 양안 관계가 스파치오 비탈레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할 터다. 중화의 일부라는 티베트, 신장위구르, 네이멍구에는 체계적으로 한족의 이주가 이루어지고 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