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비(왼쪽)-남기협(오른쪽) 부부가 지난 달 돌잔치에서 딸 인서 양을 안고 있다. 박인비 인스타그램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의 활약이 예전 같지 않다. 한국 선수들은 불과 몇 해 전까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우승을 밥 먹듯 했지만 올 시즌엔 5월 중순이 되도록 아직 1승도 신고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여자 골프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 ‘골프 여제’ 박인비(36)의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딸 인서 양이 있기 때문이다. 인서 양은 박인비와 남편 남기협 프로(43)가 결혼 9년 만인 지난해 얻은 소중한 딸이다. 남편의 성과 박인비의 ‘인’자를 따와 이름을 지었다.
지난달 열린 돌잔치에서 인서 양은 미래의 한국 대표 골퍼를 향해 성공적인 첫걸음을 내딛었다. 박인비-남기협 부부의 바람대로 돌잡이 때 골프공을 잡은 것이다. 박인비는 예전부터 “이왕이면 인서가 골프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 돌잡이 상을 세팅할 때도 골프공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을 것”이라고 말해왔는데 인서 양은 박인비-남기협 부부의 희망대로 골프공을 손에 쥐었다.
지난해 유럽을 찾은 박인비-남기협 부부의 모습. 박인비 인스타그램
박인비는 세계 최고의 여자 골프 선수 중 한 명이다. 2008년 메이저대회 US오픈 우승을 시작으로 LPGA 통산 21승을 거뒀다. 21승 가운데 무려 7번이 메이저대회 우승이었다. 4대 메이저대회 우승을 의미하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도 달성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는 116년 만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복귀한 골프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그는 남녀 선수를 통틀어 ‘골든 커리어 그랜드 슬램(올림픽 금메달+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다. 그해 LPGA투어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남편 남기협 프로는 박인비를 최고의 선수로 만든 코치다. 박인비는 첫 우승 이후 3년간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그런데 2012년부터 남 프로가 코치 겸 매니저로 박인비와 동행하면서 함께 20번의 우승을 합작해냈다. 둘은 2014년 결혼식을 올렸다.
박인비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골프에서 금메달을 딴 후 두 팔을 벌려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박인비가 인생 최고의 우승으로 꼽는 두 대회 역시 2012년 에비앙 마스터스와 2016년 리우 올림픽이다. 에비앙 마스터스는 남 프로와 함께 한 뒤 처음 맞은 우승이었고, 리우 올림픽 금메달은 드러내 놓고 욕심을 부렸던 우승이었다.
박인비는 “메이저대회도 여러 번 우승했지만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우승하고 싶었던 대회는 올림픽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보통 대회를 치를 때는 머리를 싹 비운 상태에서 임한다. 그런데 올림픽에서는 ‘반드시 단상 제일 높은 자리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났다”고 했다.
타이밍도 절묘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IOC 선수위원이 되려면 때가 맞아야 한다. IOC 선수위원에 출마하려면 올림픽이 열리는 해당 연도 또는 직전 올림픽에 출전했어야 한다. 또한 한 나라는 한 명의 선수위원만 보유할 수 있다.
박인비는 그 두 가지 요건이 모두 맞아떨어졌다. 2021년 도쿄 올림픽 때 다시 한 번 올림픽 무대에 나섰고, 2024년 파리 올림픽을 끝으로 유승민 현 IOC 선수위원(대한탁구협회장)의 8년 임기가 끝나기 때문이다.
2016 리우 올림픽 금메달은 박인비의 인생 향로를 바꿔놨다. 박인비는 이후 IOC 선수위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DB
마음속에 담아온 IOC선수위원의 꿈은 지난해 박인비가 IOC 선수위원 선거에 출마할 한국 대표로 결정되면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박인비는 김소영(배드민턴), 김연경(배구), 이대훈(태권도), 진종오(사격) 등 쟁쟁한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평가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1위를 차지했다. 체육회 관계자는 “박인비의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이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중학교 시절 미국으로 골프 유학을 떠나 고교를 미국에서 나온 박인비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한다. 미국 TV쇼에 나와 진행자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다.
박인비의 뒤에는 또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골프계의 대표적인 친목 모임인 ‘V157’ 멤버들이다. 박세리의 활약을 보고 자란 ‘박세리 키즈’들인 박인비, 최나연, 이보미, 김하늘, 이정은5, 신지애, 유소연 등 7명이 2018년 이 모임을 만들었다. 1990년생인 유소연을 제외한 6명은 모두 1988년생 용띠들이다. 모임을 만들 당시 이들이 거둔 우승을 합한 숫자가 ‘157승’이었다.
IOC위원에 도전하는 골프여제 박인비. 동아일보 DB
박인비는 “친구들이 농담처럼 ‘파리 올림픽 때도 다 같이 가서 선거운동을 돕자’고 하더라”며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만으로도 너무 고마웠다”고 했다.
최나연과 김하늘 등에 이어 최근 유소연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현재 많은 회원들이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다만 일본 투어를 주 무대로 뛰는 신지애만큼은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며 파리 올림픽 출전을 노리고 있다. 박인비는 “(신)지애에게 꼭 파리에서 만나자고 얘기했다. 지애가 선수로 나오게 된다면 정말 대단할 일”이라며 “꼭 파리에서 만나서 우리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자고 다짐도 했다”며 웃었다.
박인비의 베이비 샤워에 함께 한 V157 멤버들. 한 때 세계 여자 골프를 주름잡았던 선수들이다. 박인비 인스타그램
박인비의 선수위원 선출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수로서 워낙 출중한 성적을 올린 데다 골프는 타 종목 선수들도 여가를 통해 많이 즐기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또한 박인비는 딸을 키우고 있는 ‘워킹맘’으로서 같은 처지의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다. 만약 박인비가 IOC 선수위원이 된다면 한국에서는 처음 나오는 여성 IOC 선수위원이 된다. 그는 “골프는 전 세계적으로 저변이 넓은 종목이다. 현재 올림픽에서는 남녀 모두 개인 스트로크 플레이로 경기를 치르고 있지만 앞으로는 매치플레이나 혼성 종목 등 영역 확대를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인비-남기협 부부는 7월 26일 개막하는 파리 올림픽에 앞서 7월 중순 경 미리 파리로 출국한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 최대한 많은 선수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할 계획이다. 박인비는 “유승민 위원이 2016년 리우 대회 선거 운동 기간 450km를 걸어 6kg이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파리에서 500km를 걸어 10kg이 빠지는 걸 목표로 열심히 뛰어다니겠다”고 말한 바 있다.
박인비의 예전 호주 전지훈련 시절 웨이트 트레이닝 모습. 동아일보 DB
한창 왕성하게 선수로 뛰던 시절 그는 꾸준한 운동과 충분한 휴식을 통해 큰 부상 없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 왔다. 요즘은 그는 ‘육아’라는 또 다른 도전 속에서 나름대로 건강 관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전처럼 규칙적으로 피스니스 센터 등을 다니진 못하지만 틈틈이 유산소 운동, 웨이트 트레이닝, 필라테스 등을 한다.
식생활도 육류 위주에서 채식을 최대한 많이 하려 애쓰는 중이다. 그는 “워낙 고기를 좋아했는데 요즘은 지속 가능한 식단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두부 샐러드 등 야채류를 많이 먹으려 한다”고 했다.
박인비(왼쪽)이 올초 한 골프 브랜드 행사에서 프로야구 선수 양의지(가운데)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던롭스포츠코리아 제공
그는 어릴 때의 운동 습관이 평생의 건강을 좌우할 수 있다고 했다. 박인비 스스로도 어릴 때 골프채를 잡기 전 테니스와 수영, 스키, 발레 등 다양한 종목을 접했다. 운동과 함께 피아노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하면서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것 같다. 스키만 해도 오랜만에 타도 어릴 때의 기억으로 슬로프를 타고 내려올 수 있다”며 “인서에게도 골프 뿐 아니라 다양한 종목을 경험하게 해줄 생각이다. IOC 선수위원이 되면 더 많은 아이들이 즐겁게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