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부국장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국 병원을 찾은 적이 있다. 일상생활과 업무를 모두 영어로 하던 시기였는데도 의학 용어는 어려웠다. 호르몬계 이상이 의심되는 증세를 영어로 묘사하려니 난감했다. 의사 설명도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가뜩이나 사람 위축시키는 진료실에서 이왕이면 언어도 정서도 같은 것을 공유하는 의사한테 진찰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후엔 코리아타운의 한인 의사를 찾았다.
특정국 비하와 인종주의로 번진 논란
의료파행 장기화에 대응해 해외 의사면허를 소지한 사람들도 국내 진료를 할 수 있게 하겠다는 정부 방침을 놓고 의료계의 반발이 거세다. 보건복지부의 입법 예고에 달린 1100여 개의 의견 중 91%가 ‘반대’ 의사를 밝혔다니 이 조치에 부정적인 일반인도 적잖은 듯하다. 보건의료 재난 경보가 ‘심각’ 단계일 때만 한시적으로 허용한다지만, 국내 임상 경험이 없고 한국말도 서툰 외국 의사에 대한 불안감을 쉽사리 걷어내지 못해서일 것이다. 외국 의사면허 소지자들이 한국 예비고사와 의사 국가고시를 모두 통과한 비율은 41%로 절반에 못 미친다.
한국은 의료 수준이 높고 그만큼 국민들의 의료 서비스 기대치도 높은 나라다. 최고 엘리트들이 잡는 메스여야 내 생명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다. 같은 한국인 의사라도 이왕이면 서울 대형병원 의료진에게 치료받고 싶다며 전국 각지에서 상경하는 게 우리나라 환자들이다. 의사들의 반발이야 예상됐던 것이라고 해도 이런 국민감정에 대한 고려 없이 불쑥 내놓은 정부의 조치는 섣불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국내에서 인정하는 해외 의대는 38개국 159곳이다. 국내에서 조건부로 한시적 진료라도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외국인 의사보다는 이들 의대에서 유학한 한국인이 대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의사면허를 돈 주고 산 부유층 자제들’이라는 시각이 있지만, 이들 중에는 의사의 꿈이 간절한데 내신 1등급, 수능 만점 수준의 성적은 받지 못해 해외 우회로를 찾겠다는 이들도 있다. 헝가리 의대의 경우 입학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공부가 쉽지 않아 유급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사들의 엘리트 우월주의 돌아봐야
의료계가 의대 증원의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며 정부와의 협상을 거부한 지 벌써 석 달이 되어간다. 역효과를 부르는 임시방편을 초강수로 내놓는 정부도 문제지만, ‘우리 안에서 늘리는 것도, 외부에서 데려오는 것도 다 안 된다’는 식으로 버티는 의사들의 대응도 답은 아니다. 험난한 N수를 거쳐 바늘구멍보다 좁은 의대 입시의 문을 통과한 소수만이 의사 자격이 있다는 식의 배타주의, 엘리트 우월주의가 사안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무엇보다 필수의료 분야와 지방의 의사 부족 문제를 풀지 못하면 실제 외국인 의사들을 수입해야 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통역기를 손에 든 환자들이 손짓발짓해 가며 낯선 외국인 의사들에게 진료받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환자도 의사도 바라는 장면은 아닐 것이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