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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도 병[이준식의 한시 한 수]〈264〉

입력 | 2024-05-16 22:54:00


시들시들 사라져가는 붉은 꽃잎, 아직은 자그마한 푸른빛 살구.
제비가 날아드는 시절,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푸른 강물.
가지 위 버들개지 바람에 날려 줄어들지만, 하늘가 어디엔들 방초(芳草)가 없으랴.
담장 안엔 그네, 담장 밖에는 길. 담장 밖엔 행인, 담장 안에선 미인의 웃음소리.
웃음소리 점점 사라지고 말소리 옅어지니, 무정한 미인 탓에 괴로운 건 정 많은 행인.

(花褪殘紅青杏小. 燕子飛時, 綠水人家繞. 枝上柳綿吹又少, 天涯何處無芳草. 墻裏鞦韆墻外道. 墻外行人, 墻裏佳人笑.笑漸不聞聲漸悄, 多情卻被無情惱.)




―‘봄 풍경(춘경·春景)’/‘접련화(蝶戀花)’ 소식(蘇軾·1037∼1101)





봄이 저물면서 꽃마저 사그라들지만 아쉬울 건 없다. 풋살구가 열리고 제비가 날고 푸른 강물이 마을을 감돈다. 버들개지가 없어져도 세상에 넘쳐나는 게 향기로운 풀, 도처에 생기가 그득하니 저무는 봄에 미련은 없다. 객지를 떠도는 길이든 잠깐 마실 나온 길이든 자연 풍광에 도취한 행인의 발걸음은 경쾌하다. 이때 들려오는 여인의 웃음소리, 마음이 설렌다. 고향에 남은 여인을 떠올린 때문일까, 평소 마음에 둔 여인의 익숙한 웃음소리여서일까. 한데 행인의 즐거운 상상을 외면한 채 그 소리는 점차 멀어진다. 고뇌에 빠진 행인, 그는 다정(多情)이 외려 병이란 사실을 알기나 할까.

‘하늘가 어디엔들 방초가 없으랴’는 자주 인용되는 명구. 어떤 역경에서도 기회와 희망은 있다는 낙천적인 메시지로 쓰인다. ‘세상에 어디 여자(남자)가 너밖에 없어’라는 거친 표현을 대신하는 말로도 많이 쓴다. ‘접련화’는 곡조명.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