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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독일이 소련 점령했다면 세계사는 어떤 모습일까

입력 | 2024-05-18 01:40:00

“히틀러가 모스크바 차지했다면… 나치 계획 실현됐을 가능성 농후”
당시 사료 근거로 촘촘하게 논증
미국, 영국에게서 독립 안했다면… 남북전쟁 겪지 않았을 수도 있어
탄탄한 논리 ‘가상 역사’ 흥미진진
◇버추얼 히스토리/니얼 퍼거슨 등 지음·김병화 옮김/600쪽·3만5000원·지식향연



1776년 6월 28일 의회에 토머스 제퍼슨 등 5명이 독립선언문 초안을 제출하는 장면을 묘사한 존 트럼벌(1756∼1843)의 그림 ‘독립 선언’.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을 비롯한 저자들은 미국 독립 등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전혀 다르게 흘러간 ‘가상의 역사’를 제시해 “우리가 아는 모든 역사는 필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나간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과거를 곱씹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과거에 다른 행동을 했더라면 조금 다른 현재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라는 공상과 함께 말이다. 영화 ‘어벤져스’부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는 콘텐츠에 대중이 늘 반응하는 이유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을 대할 때만큼은 좀처럼 사실과 다른 가정을 하는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말은 교과서처럼 여겨진다.

신간은 ‘가상 역사’를 통해 색다른 시도를 한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부터 소련의 공산주의 붕괴까지 굵직한 역사의 ‘평행 우주’ 버전을 들려준다. ‘미국이 독립하지 못했다면 노예제 폐지가 가능했을까?’ ‘소련에 고르바초프라는 지도자가 없었어도 공산주의가 그토록 빨리 붕괴됐을까?’와 같은 흥미로운 가정을 던진다. 일종의 픽션(fiction)이지만 책이 가볍지는 않다. 이 책은 21세기 최고의 경제사학자로 불리는 니얼 퍼거슨을 비롯한 석학 9명이 1997년 낸 것으로, 이번에 한국어 버전이 처음 출간됐다.

역사에서 다른 과거를 가정하는 행위는 결코 무용하지 않다. 당시 인물들의 발언과 에피소드, 사회상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역사를 보면서 결과론적 해석과 이로 인한 편견을 지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역사가 필연은 결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또 만일 미국이 식민지 ‘영국령 아메리카’로 남았다면 미국이 1833년 노예제를 폐지한 영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이에 따라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전쟁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분석한다.

독재의 상징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초상화. 신간은 “히틀러가 1941년 겨울 이전 모스크바를 점령했다면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겼을 수도 있다”는 오싹한 가정을 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수많은 책과 영화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이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가정을 다루면서도 미국의 참전을 통한 연합국의 승리를 낙관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미국과 영국의 관계, 실제 역사 속 미국의 참전 계기 등을 종합할 때 이런 믿음은 후대의 ‘희망’에 가깝다고 말한다. 히틀러가 주변 조언을 토대로 1941년 겨울 이전 모스크바를 점령해 소련을 무너뜨렸다면 나치의 계획이 실현됐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책에선 독일이 동부전선에 대해 남긴 수많은 자료를 인용한다. 이 외에도 ‘존 F 케네디가 살았더라면?’ ‘만약 스탈린이 냉전을 피할 수 있었다면?’ 등 흥미로운 지점에서 역사를 비틀어 본다.

신간에 따르면 역사는 고정된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우연과 행운, 실수와 성급함이 복잡하게 작용한 결과에 가깝다. 사소한 변수만으로 지금과 전혀 다른 역사가 펼쳐졌을 수 있다는 상상은 우리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각 장의 저자들이 단단한 근거와 논리적인 맥락을 곁들여 상상력을 발휘하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역사로 이어지기까지 여러 변수를 동시에 고려하기에 가정이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령 책은 모든 역사적 사실을 상수로 놓고 한 가지 변수만 제시하는 방식을 지양한다. 스탈린의 소련이 냉전의 승리자가 됐을 가능성을 논할 때, ‘소련 정보부가 서구에 침투하지 않았을 경우’ ‘스탈린이 서구의 세력권 개념을 받아들였을 경우’ 등으로 상황을 나눠 추론한다.

30년 전 책이지만 오늘날 역사적 사실을 돌아볼 때 주는 교훈도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 등 굵직한 한국의 역사적 사건에 ‘만약에’ 가정법을 적용해 봐도 좋을 것이다. 역사적 결과보다 더 입체적이고 다양한 사실을 풍부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