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세 번째 직장에 다니던 때였다. 변화와 성장에 목말라 있었지만 어떤 경력직 공고를 보아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업계, 비슷비슷한 직무로의 이직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다짐만 있을 뿐 달리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도 없었다. 당장 하루치 선택들에 매몰되어 시간만 가고 답은 보이지 않았다.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백수가 되자 두려웠지만 생각과는 달리 해방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늘 대책이 있는 삶만 살아왔다. 이 줄을 잡은 채 저 줄을 잡아 왔다. 행여 놓칠까 노심초사했던 줄을 자발적으로 놓아버리자 강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손에 쥔 것이 없으니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뭣보다 당장의 출근에서 삶으로 고민의 추가 옮겨가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넓어진 기분이었다. 하루 최소 8시간, 몸뿐 아니라 마음도 종속돼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작 반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이후 몇 가지 불가역적인 감각이 남았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스스로 시간을 부여할 수 있다는 주체적 감각, 어떤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길을 찾아갈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출근을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 하게 했다.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감각이 마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살게 하는 것처럼. 회사 바깥의 시야라는 ‘제3의 눈’이 생긴 것 같았다. 곧 죽을 것처럼 괴롭던 일도 사람도 그 눈으로 거리를 두고 보면 새삼 별것 아닌 것이 되었다.
대책 없는 퇴사를 종용하고 싶진 않지만 생각한다. 가끔은 대책이 없어도 되는 것 아닌가. 아니,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은 채 얻을 수 있는 것이란 극히 제한적이므로. 그렇게 내놓은 답안은 대개 관성적이라 안전하고 무난한 것들 일색이므로. 손에 쥔 것이 없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앞서의 점들이 이루는 궤적을 끊어냈을 때 마침내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이 있다.
만일 그해 어떤 조직으로도 옮겨가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건 아마 그런대로 괜찮았을 것이다. 어떤 결정을 하건 인생에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고, 분명 또 새로운 길을 찾았을 테니까. 어쩌면 그게 지금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도전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나, 가장 쉬운 것은 안주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때로는 도망이 도전일 때가 있다. 무대책의 용기가 대책일 때가 있다. 어쩌면 그러한 단절과 변주가 뻔한 인생의 극적 재미 아닐까.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