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수도 프라하 블타바강 변의 스메타나 박물관 앞에 프라하 성과 카렐 다리를 배경으로 세워진 작곡가 스메타나의 동상.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체코 수도 프라하의 관광 명소인 카렐 다리를 동쪽으로 건너 오른쪽으로 돌면 블타바강 변에 1936년 세워진 스메타나 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1824∼1884)를 기리는 장소다. 박물관 앞에는 스메타나의 동상이 있다. 동상과 15세기 지어진 카렐 다리, 블타바강, 멀리 프라하 성이 그림엽서 같은 정경을 이룬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블타바(몰다우)강’의 유장한 선율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스메타나의 박물관과 동상이 카렐 다리 가까이 있는 것은 그가 ‘블타바강’을 썼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스메타나는 이 다리 위의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방어 책임자였다.
1848년 3월 프라하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대부분 지역을 뒤흔들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던 시민 혁명의 일환이었다. 프랑스인이나 독일인들의 요구는 시민들의 자유를 확대하고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체코인들의 목표는 독립 국가를 세우거나 최소한 자치권을 부여받는 것이었다.
6월이 되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대가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몰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스메타나를 비롯한 시민군은 카렐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쌓았고 하블리체크는 친구인 스메타나에게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책임을 부여했다. 그러나 일거에 들이닥친 황제군은 바리케이드와 시민군을 쓸어버리고 프라하에 구체제를 회복했다.
놀랍게도 스메타나는 투옥되지 않았다. 통제의 압력을 완화함으로써 불안을 잠재우려는 오스트리아의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혁명의 지도자였던 하블리체크도 감형 끝에 석방됐다.
이후 스메타나는 다시 깊어진 고국의 정치적 억압에 더해 세 딸의 잇따른 죽음 등 개인적 불운까지 겹친 가운데 스웨덴의 예테보리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시간이 흘러 오스트리아 제국에 한층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자 1861년에 그는 프라하로 돌아왔다. 카렐 다리 아래를 흐르는 유장한 물줄기를 1875년 교향시 ‘블타바강’에 담아내면서 스메타나는 혁명의 열기를 핏줄의 고동으로 느꼈던 20대의 젊은 날을 회상했을 것이다.
1848∼49년 유럽 혁명이 가져온 성과는 미미했지만 이 격정의 시기를 통과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유와 애국심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자라고 있었다. 스메타나 한 세대 뒤 그의 후예인 체코의 드보르자크, 노르웨이의 그리그 등에 의해 만개한 민족주의 음악의 결실도 이 혁명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크건 작건 19세기 중반을 통과한 혁명의 이상이 움터 각국의 민족적 색채로 화려한 꽃을 피워낸 결과였기 때문이다.
독일 음악극의 아버지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건물에 올라가 시민들을 선동했다는 죄로 독일에서 추방됐다. 그는 13년 동안 다시 독일 땅을 밟을 수 없었다. 일찍이 러시아에 점령된 고국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쇼팽의 경우는 한결 불운했다. 파리 살롱계가 혁명의 여파로 줄줄이 리사이틀을 취소하면서 생계가 막막해진 것이다. 쇼팽은 새로운 청중을 찾아 영국 런던으로 향했고, 습하고 탁한 런던의 공기에 건강을 상하고 만다. 혁명이 종식된 1849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는 현악 4중주단 토너스 콰르텟이 연주하는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린다. 바이올리니스트 양고운(경희대 교수), 김예지, 비올리스트 한연숙, 첼리스트 이강호(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가 스메타나 현악 4중주 1번 ‘나의 생애에서’와 드보르자크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 등을 연주한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