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문화부 차장
고대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년∼기원전 19년)가 쓴 서사시 ‘아이네이스’는 그리스 고전의 ‘창조적’ 짜깁기에 가깝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아이네이아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처럼 한동안 지중해를 방랑하며 신들에게 모진 괴롭힘을 당한다. 가장 인상적인 건 호메로스의 또 다른 작품 ‘일리아스’에서 싸움을 포기하고 불타는 트로이에서 도망치는 아이네이아스를 로마를 건국하는 주인공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이다.
트로이를 멸망시킨 오디세우스가 아닌, 패배한 트로이인을 굳이 로마의 시조로 삼은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문화사학자 마틴 스푸너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로마가 그리스를 그저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리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로마가 원형(原型)에 해당하는 그리스 문화를 금과옥조처럼 지킨 게 아니라, 자기 것으로 창조적 변용을 가했다는 것이다.
최근 국가유산청의 ‘퓨전 한복’ 개선 방침을 둘러싼 논란은 문화 원형의 고수와 변용이라는 오랜 대립항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경복궁 앞 한복대여점에서 취급하는 퓨전 한복은 속치마에 철사 후프를 넣어 부풀리거나, 금박 무늬를 빼곡히 집어넣는 등 화려함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젊은층은 물론이고 외국인들도 앞다퉈 퓨전 한복을 입고 고궁에서 사진을 찍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하는 게 유행이 된 지 오래다.
이에 대해 온라인에서는 “전통 한복의 고유성을 지키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과 더불어 “개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춰 개량한 한복을 국가가 나서서 왈가왈부하는 건 문제”라는 반론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국가유산청 주최 ‘궁중문화축전’에 참여한 젊은 무형유산(무형문화재) 전승자의 목소리를 참고할 만하다. 다니던 은행을 관두고 3대째 방짜유기장(불에 달군 놋을 망치로 때려 기물을 제작하는 장인) 가업을 잇고 있는 이지호 씨(38)는 요강이나 대야 등 전통 유기제품 수요가 급감하자 현대적 디자인을 접목한 유기 식기와 수저, 테이블을 만들고 있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무형유산이 계속 살아남으려면 ‘전통의 현대화’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호메로스의 원작을 변용해 로마에 적용한 ‘아이네이스’를 짝퉁 취급하며 폄하하는 평론가는 거의 없다. 오히려 문화 접목과 변용을 통해 로마의 위대한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다. 물론 전통 한복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하지만 젊은층의 기호가 가미된 퓨전 한복도 전통의 현대화 혹은 문화 변용의 또 다른 사례로 볼 여지도 있지 않을까. 17일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을 계기로 문화유산 보존에 치우친 기존 정책 방향을 활용으로 확장하겠다고 발표한 국가유산청의 열린 자세가 아쉽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