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대통령 헬기 추락사’ 신경전 사고 헬기 1976년 도입 노후기종 이란 “美의 범죄” 美 “한 게 없다” 하메네이 후계자로 차남 유력설… 세습 반발에 권력투쟁 가능성도
대통령 시신 운구 트럭… 애도하는 이란 시민들 21일 이란 북서부 타브리즈에서 열린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추모객들이 시신 운구 트럭 주위에 모여들어 애도하고 있다. 라이시 대통령은 시아파 성지 쿰, 수도 테헤란 등을 거쳐 23일 그의 고향 마슈하드에 안장된다. 그는 이틀 전 인근 산악지대에서 헬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타브리즈=AP 뉴시스
● 이란 “美 제재 탓”…美 “이란 책임”
이란은 1979년 이슬람혁명 당시 민간인 희생, 주이란 미국대사관 소속 미국인 억류, 핵개발 의혹 등으로 수십 년간 미국을 비롯한 서방 주요국의 경제 제재를 받아 왔다.
이란 측이 문제 삼는 부분이 이 대목이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전 외교장관은 20일 “미국의 제재가 대통령 일행의 순교를 초래했다. 미국의 범죄는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반발했다. 오랜 제재로 인해 제대로 된 항공 부품을 조달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기껏 구한 항공 부품도 대부분 암시장에서 조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슈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같은 날 “악천후에 헬기를 띄우기로 결정한 주체는 다름 아닌 이란”이라며 “제재를 사과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도 “미국이 사고에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동조했다.
특히 국무부는 애도 성명에서 라이시 대통령이 정치범 5000여 명 처형, 반정부 시위 탄압 등을 주도한 사실을 거론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그는 손에 많은 피를 묻혔다. 역내 안보 저해 행위에 대한 이란의 책임도 계속 물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밀러 대변인은 이란 측이 사고 발생 직후 “헬기 수색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물류 문제로 지원하지 못했다고 했다.
라이시 대통령의 장례는 2박 3일 동안 치러진다. 21일 사고 장소와 가까운 타브리즈에서 시작해 시아파 성지(聖地) 쿰, 수도 테헤란 등을 거쳐 23일 그의 고향 마슈하드에 안장된다.
수도 테헤란의 도심 발리아스르광장 등은 추모객으로 가득 찼다. 검은색 차도르를 입은 채 그의 사진을 들고 울부짖는 여성들도 외신에 다수 포착됐다. 반면 일부 젊은층이나 2022년 9월 히잡 미착용을 이유로 의문사한 마흐사 아미니의 고향 사케즈 등에서는 그의 죽음을 반기며 불꽃을 터뜨리는 모습이 보였다고 가디언 등이 전했다.
2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한 미국 등 각국 대표들은 라이시 대통령을 추모하는 묵념을 했다. 반면 이스라엘 측은 “안보리가 ‘학살자’를 애도했다”고 반발했다.
이란 안팎의 관심은 절대 권력을 보유한 하메네이의 후계 구도에 쏠린다. 뉴욕타임스(NYT),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그간 공식 직책이 없었음에도 하메네이의 ‘돈줄’로 꼽히는 국영기업 세타드 등을 관리했던 차남 모즈타바의 존재감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성직자 아라피는 모즈타바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낮지만 종교계에 영향력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통신은 “하메네이가 라이시 대통령만큼 충성심이 강하면서도, 본인을 드러내지 않는 후계자를 찾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